완계정사(안훈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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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지만 완계정사로 들어가는 길은 쇠줄로 막혀있다.
덕양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덕양사(德陽祠)
전라남도 기념물 제56호 /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36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옛 성현을 제사하고 제자를 교육하던 사설기관이다.
이 서원은 평산신씨의 시조이며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 장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22년(1589)에 건립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선조 36년(1603)에 재실이 다시 지어졌으며 현종 6년(1655)에 이전의 서원 규모로 다시 지었다. 이후 숙종때 (1695) 덕양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배양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다가 1934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은 신씨 문중과 호남유림들이 봄가을에 제향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은 성인문, 덕양사, 연서재, 신덕재, 강당, 외삼문, 내삼문, 비각,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 졌으며, 지붕형태는 팔작지붕(옆에서 볼 때 '八')이다.
덕양사 옆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자정(子精)은 안훈 선생의 자(字)이다. 공훈록에는 안자정으로 등록되어 있다.
浣溪精舍(완계정사)
浣溪精舍(완계정사)
완계정사(浣溪精舍)
관리번호 : 55-1-27 / 관리자 : 안형식(증손) / 위치 :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51 / 규모 : 부지-330㎡, 사당, 산앙재
완계정사(浣溪精舍)는 근대 유학의 거두였던 분암(憤庵) 안훈(安壎) 선생(1881~1958)이 27세에 건립한 서당이다. 전통서당의 양식을 따라 중앙에는 서재를 두고 정면은 선생의 공부방으로, 동쪽과 서쪽은 학동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의 완계정사는 2003년, 산앙재는 2002년에 재건립되었다. 일찍이 면우 곽종석(冕宇 郭鍾錫) 선생의 문하에서 그의 제자로 학문에 정진한 분암 선생은 1919년 파리만국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보낸 137인 중의 한 분이다. 1900년대 초부터 광복을 전후한 시기까지 천여명의 제자들을 이 곳에서 양성하여 호남유학의 한 줄기를 형성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단발령, 창씨개명 등 중요 정책에 반대하면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으며, 급기야 1941년 의병장 이석용(李錫蓉)의 추모비를 세우려다 일경에 검거돼 임실형무소에서 130일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완계정사는 선생의 학풍과 애국정신을 추종하는 학동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으며 선생의 저서로는 분암집 26권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며 203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憤庵 安先生 講學碑(분암 안선생 강학비)
憤庵 安先生 講學碑(분암 안선생 강학비)
山仰齊(산앙재)
원래 이곳에는 분암서실이 있었지만, 완계정사를 복원할 때 같이 합하였다고 한다.
기념식수

금은빛 물결치는 금천천 굽어돌아
어머니 품속같은 천덕산 완계정사
의절의 호국정신 면면히 이어받아
푸른꿈 무지개꽃 희망의 횃불들고
어린시절 수학하며 호연지기 키우던곳
영원히 빛나거라 내 글방 완계정사

그 시절의 꿈! 형제수를 심다.

2012. 5. 1 담양군 부군수 최희우
浣溪瀑布(완계폭포)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51 덕산마을 분암 안훈(안자정) 선생의 서당 완계정사를 찾아가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적지
완계정사(浣溪精舍)
건립일자 : 1901년
소재지 :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완계정사(浣溪精舍)는 근대 유학의 거두였던 분암(憤庵) 안훈(安壎) 선생(1881~1958)이 27세에 건립한 서당이다. 전통서당의 양식을 따라 중앙에는 서재를 두고 정면은 선생의 공부방으로, 동쪽과 서쪽은 학동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일찍이 면우(冕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의 문하에서 그의 수제자로 학문에 정진한 분암(憤庵) 선생은 1919년 파리만국회의에 조선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보낸 137인 중의 한 분이다. 1900년대 초부터 광복을 전후한 시기까지 수천명의 제자들을 이곳 완계정사(浣溪精舍)에서 양성하여 호남유학의 한 줄기를 형성해 왔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제의 단발령, 창씨개명 등 중요정책에 반대하면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으며, 급기야 1941년 의병장 이석용의 추모비를 세우려다 일경에 검거돼 임실형무소에서 일백십일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완계정사(浣溪精舍)는 선생의 학풍과 애국정신을 추종하는 학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선생의 저서로는 분암집 26권이 있다. 이러한 선생의 고귀한 독립정신의 얼을 계승하고자 국가보훈처에서 이곳을 '독립운동사적지'로 지정하였다.
왼쪽이 완계정사로 들어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덕양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浣溪精舍(완계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