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수 의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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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197
탐방로그
애국지사 청호 유인수 선생 의적비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197 덕산회관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청호 유인수 선생 의적비
관리번호 : 55-1-28 / 관리자 : 유회주(증손) / 위치 :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197번지, 덕산회관 맞은편 / 규모 : 부지 17㎡, 비석
조선조 말 왜적에게 국권이 침탈됨에 주권을 되찾고자 투쟁하는 의병에게 거금을 연조한 애국지사 청호 유인수 선생(일명: 병채, 병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향민들이 서기 2002년에 세운 비이다. 그는 서기 1860년 3월 17일 곡성군 목사동면 평리에서 태어나 학문을 익히며 이웃과 친척을 도우며 조부 감찰공의 효자정려를 세우고 숭조사업에 힘썼다. 서기 1906년 면암 최익현의 의병이 곡성에 행진할때 의거자금을 지원하고, 서기 1908년부터 5년간 정재 이석용의진에 거액의 독립운도아금을 지원하고, 1912년 같은 고향의 안훈, 안재창, 조영선, 조우식등과 이석용 의병장의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조직한 임자동밀맹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거처를 오곡면 오지리로 다시 덕산리로 옮겨 살다가 서기 1927년 8월 26일 자택에서 별세하니 유고 1편을 남겼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서기 2001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愛國志士 靑湖 柳寅秀 先生 義蹟碑(애국지사 청호 유인수 선생 의적비)

관리번호 : 55-1-28 / 관리자 : 유회주(증손) / 위치 :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197번지, 덕산회관 맞은편 / 규모 : 부지 17㎡, 비석
조선조 말 왜적에게 국권이 침탈됨에 주권을 되찾고자 투쟁하는 의병에게 거금을 연조한 애국지사 청호 유인수 선생(일명: 병채, 병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향민들이 서기 2002년에 세운 비이다. 그는 서기 1860년 3월 17일 곡성군 목사동면 평리에서 태어나 학문을 익히며 이웃과 친척을 도우며 조부 감찰공의 효자정려를 세우고 숭조사업에 힘썼다. 서기 1906년 면암 최익현의 의병이 곡성에 행진할때 의거자금을 지원하고, 서기 1908년부터 5년간 정재 이석용의진에 거액의 독립운도아금을 지원하고, 1912년 같은 고향의 안훈, 안재창, 조영선, 조우식등과 이석용 의병장의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조직한 임자동밀맹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거처를 오곡면 오지리로 다시 덕산리로 옮겨 살다가 서기 1927년 8월 26일 자택에서 별세하니 유고 1편을 남겼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서기 2001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조선조말에 왜적이 들어와 조정을 용략하고 을미늑약으로 국권을 침탐함에 분연히 일어나 구국의 의거 대열에 앞장서려 하였으나 생래의 체약으로 그 뜻을 펴지 못하고 거금을 연조하여 의병들의 항왜 투쟁을 지원한 분이 있었으니 바로 애국지사 청호 유인수 선생이다. 공은 선산인으로 자는 문휴요 초명은 인수 후명은 병채 보명은 병채 태청호는 호이다. 철종 11년 서기 1860년 3월 17일 공성군 목사동 면평리에서 통사랑 선공감 가감역인 고 휘 노식과 비 이천 여씨의 장자로 태어나다. 조부 휘 인은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으니 증 사헌부 감찰이요 8대 조 휘 익청은 병자 창의로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이요 11대조는 호남 4현으로 숭모하는 휘 희춘 호 미암이니
행 이조참판 증 좌찬성 시는 문절이다. 공은 충효세가에서 태어나 총명호학하였으나 문옹은 공의 신약을 걱정하여 독학하지 않았는데 능히 천여권의 장서를 섭렵하고 높은 학행으로 청호유고를 남기다. 천성이 순인하여 양친에 성효하고 위선에 진력하며 형제가 곤궁할 때 이를 구하고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널리 이웃을 진휼하다.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살때 서기 1906년 면암 최익현의 의병이 곡성에서 행진함에 의거자금을 후원하고 병고로 막하에는 참전하지 못했으나 다음해 정제 이석용이 거의하자 3차에 걸쳐 38량 당시 옥답 19두락 값의 군자를 지원하면서 정제가 전라좌도와 영남일대에 걸쳐 20여인으로 조직한 임자동밀맹단에 동향의 안훈 안재창 조영선 조우식 등과 가맹활동하다. 이 사실은 백년동안 묻혀있다가 서기 2000년 증손 회수가 이석용 의병장의 문집과 불기록에서 그 사실을 밝혀내어 공이 구국활동에 기여한 실적을 인정받아 늦게나마 서기 2001년 건국포장을 봉수하다. 비록 전투에 동참은 못했으나 거재로 의병을 도운 것은 국가가 있어 가정이 있고 민족이 있어 내가 있으니 나의 모든 것이 그대로 나라의 것이라는 투철한 국가의식과 빼앗긴 주권을 기어이 찾고야 말겠다는 구국단원은 총을 들고 적과 싸운 의군이나 군자를 도와 의군이 항전케 한 선생이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 또한 이름을 세가지로 변용했고 의병 지원을 가족도 모르게 한 일은 후환을 피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왜경의 추적을 따돌려 우리 의군의 작전을 보호하려는 치밀한 계략이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호시탐탐한 왜경의 의심을 받아 누차 결문을 당했지만 일체를 부인하고 서기 1927년 8월 수 68로 오곡면 덕산리 자택에서 서거하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니 옥천 조씨생은 만기 원기와 평산 신씨생인 영기 형기 현기 선기 택기 등이다. 아아 인과 의로 일관한 공의 거룩한 삶에 찬미의 노래를 부치노니 - 충효의문 후손으로 효우진휼 다했지만 나라 잃은 겨
레 슬픔 신약이라 어이하리. 면학 거의와 함께 못해 못내 후회하시다가 독립주권 기어 찾자 정제 의군 크게 밀어 구국 위한 뜨건 단애 조국광복 이뤄내니 역사 위의 장한 이름 천추만대 빛나시리.
대한민국 84년 서기 2002년 8월 15일
의적비를 세우며
지난날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청호 류인수(靑湖 柳寅秀) 선생이 서기 2001년 8월 15일 제56주년 광복절을 기하여 영예로운 건국포장 제1839혹를 봉수하다. 이에 우리 향민들은 선생의 투철한 주체정신과 열렬한 희생정신이 조국광복의 원동력이 되었고 민족번영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높이 추앙하고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길이 전승하고자 곡성군의 지원금과 후손의 헌성금으로 삼가 이 비를 세우다.
서기 2002년 8월 15일 애국지사 청호 류인수 선생 의적비 건립 추진위원회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197 덕산회관 맞은편
애국지사 청호 유인수 선생 의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