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산44-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毅齋 奇山度 義士 追慕碑(의재 기산도 의사 추모비)
관리번호 : 55-1-6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기산도(奇山度) 의사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다.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1905년 11월 18일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06년 2월에는 적신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피체되어 악형을 받았다.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나온 그는 1920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가혹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전남 장흥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돌아가신 지사의 충정과 기백을 추모하고 후세에 역사교육의 산 장으로 삼고자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994년 12월 2일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관리번호 : 55-1-6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기산도(奇山度) 의사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다.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1905년 11월 18일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06년 2월에는 적신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피체되어 악형을 받았다.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나온 그는 1920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가혹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전남 장흥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돌아가신 지사의 충정과 기백을 추모하고 후세에 역사교육의 산 장으로 삼고자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994년 12월 2일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우리나라 500년 사직의 왕조는 단기 4223년을 ?후한 10년간에 강대국 청로일등의 식민지쟁투전속에서 민족사상 씻지못할 망국의 비분을 당하지만 할수없게??? 4227.8양년에 걸처 청일전쟁으로 대청제국을 패배시키고 4227.8양년에 걸처 노일전쟁으로 대노제국을 격퇴시키고 ???하여 4228년 11월 19일에 소위 을사오조약을 체결하게되어 이 나라의 주권이 일제의 독아에 침해되니 치욕????
의사는 적신 이근택의 자살미수 범인으로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끝에 8지에 못을 박은 정상과 다리에 주리를 틀어 반신불수가 된 색각으로 단기4249년에 10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나 요감시인물로 지목받아 2명의 왜경 감시원이 항상 미행함으로 거향하면 친척까지 감사를 받을까 염려하여 강원 충청 등지를 전전유리하다가 익년에 도화면 당오리에 거주한 친족 기하요(호진)집에 찾아와 고용인으로 가장하여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후진을 교회하되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중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도화면 유지를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여의천의 황의석 집에 은신함에 일경보조원이 내습함으로 황씨의 모 정부인이 재빨리 큰 항아리 속에 의사를 감추어 체포를 면탈케 하였다. 그후 의사는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할 목적으로 기미년 여름에 제자 박길용 기항연을 데리고 광부 송정리역 구내에서 일숙하고 익일 기차를 타려고 막 개찰할 무렵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일경이 나타나 체포 당함으로 3인이 풍비박산하여 두 제자는 돌아오고 의사는 기어코 평안도 진남포까지 가서 도선코져 하였으나 경비가 삼엄함으로 할 수 없이 다시 돌아와 ○○용의 매와 결혼하여 1녀를 낳았다. 그 후 의사는 독립군의 군자를 모금하는 한편 그 방법으로 민영환의 충절을 혈죽묵화로 만들어 명문부호의 집은 물론 대마면 상남리 송주봉 댁에 가 상당한 거금을 받아 군자로 헌납하였다. 그러던 중 단기 4255년 7월 기하요의 서재에서 일헌병 矢羽田에게 체포되어 ○○인물을 자백하라고 가혹한 형벌을 가함으로 의사는 굳게 입을 다물고 단설하여 버렸으며 광주형무소에서 또 5년의 옥살이를 하고 나와 전신상○가 한 몸으로 처를 따라 장흥의 어느 피촌에서 망국의 원한을 품고 50세의 원백으로 서거하니 그 비통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그 명리를 버리고 살신성인을 한 정신은 어찌 우리 겨레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지 않으리오.
단기 4327년 월 일 의재 기산도 의사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근기 임정 신병희 서
단기 4327년 월 일 의재 기산도 의사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근기 임정 신병희 서
전남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산 44-2 충효공원 의재 기산도 의사 추모비를 찾아왔다.
의재(毅齋) 기산도(奇山度) 의사 추모비
관리번호 : 55-1-6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기산도(奇山度) 의사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다.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1905년 11월 18일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06년 2월에는 적신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피체되어 악형을 받았다.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나온 그는 1920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가혹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전남 장흥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돌아가신 지사의 충정과 기백을 추모하고 후세에 역사교육의 산 장으로 삼고자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994년 12월 2일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관리번호 : 55-1-6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기산도(奇山度) 의사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다.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1905년 11월 18일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06년 2월에는 적신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피체되어 악형을 받았다.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나온 그는 1920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가혹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전남 장흥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돌아가신 지사의 충정과 기백을 추모하고 후세에 역사교육의 산 장으로 삼고자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994년 12월 2일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流離焉乞之士(유리언걸지사, 떠돌이 거지 지사) 의재 기산도 의사 유언
단군성조를 개국의 발상으로 하여 공동의 혈통을 계승하여온 우리 배달민족의 기백은 국가의 안위가 있을때마다 위국진충이요 살신성이란 미덕을 가지고 고조선과 삼한삼국시대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근대사의 조선조에 있어서 임진정유왜란이나 정유병자호란에 있어서는 말할필요조차 없거니와 한말인 경술국치를 당함에 세계대국에 비하여 비록 소수민족이라 할지라도 어느 다수민족에 대할수있는 위열을 발휘할 사실은 우리선조들의 자랑이고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된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한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 조족(早族)의 한사람인 의재 기산도의사가 항일독립투쟁운동가의 한사람으로써 활약한 사실은 우리 조성(早姓)으로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 동시에 금반 의사의 추모비 건립을 함에 있어서 의리상 당연히 우리씨성이 오로지 노력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흥군수 도화면장 및 도화에 계신 여러 어르신과 원로를 비롯하여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 집행준비원 추진위원 등의 제위께서 물심양면으로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고 일치단결하여 헌신적으로 심혈을 경주하여 주신데 대하여 우리 비성으로서는 도화에 거주하신 여러 어르신들이 이와같이 성의있는 온정의 미덕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무한한 감사함을 표시하옵고 이를 포양하여 후세에 알려서 후진으로 하여금 그 규범이 되기 위하여 몇마디의 본말의 말씀을 약기한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