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용 충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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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과역면 과역리 산6
탐방로그
본 사적은 1999년에 광복회 광주전남 연합지부에서 정부의 지원으로 건립한 충훈비이다.
과역면 출신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현충탑(과역면) 옆에 있다. 해당 현충탑(과역면)은 1997년, 후대에 애국심과 애향심을 계승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나온다.
인근에는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장이었던 이병채의 기적비가 함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士 金公 在瑢 忠勳碑(의사 김공 재용 충훈비)
의사 김녕김공 충훈비문
1929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리 오천년 민족사에 영원히 빛나는 조국광복 학생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구원의 불길이요! 이 광주학생광복운동의 지도자였던 공의 순국의 의기는 우리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불타리라. 공의 본은 김녕이며 휘는 재용이요 일휘 사빈이시다. 경순대왕의 넷째 왕자 은설의 후예로서 해동천재의 유서 깊은 명맥으로 이왕의 국반이요 금세의 대벌이라. 관조는 고려때 봉군받은 문열공 휘 시흥이며 단종사화때 고흥에 입향한 영돈녕부사공 휘 준의 20세이며 임란공신 묵재공 휘 언공 13세로서 충절지신은 위국지충으로 현하고 인의지사는 명도지공으
로 창하였다! 공은 1907년 고종 44년 정미 8월 1일 고흥군 과역면 분천리에서 팔영산 정기를 받아 부친 영○공과 모친 밀양박씨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천자가 총명강의하였고 학문과 충효심이 뛰어났다. 과역보통학교 2회 졸업한 후 부안임공 영화의 따님 명례 규수와 혼인하셨다! 광주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공은 일제의 민족 탄압과 식민지 노예교육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광주고보 광주농업 광주사범 광여고 수피아여고보생들과 모의 항일 비밀결사인 성진회를 조직하였고 뒤이어 항일민족문화와 항일사회교육연구를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중앙위원회까지 결성하는데 주력하셨다! 공은 젊은 목숨바쳐 조국광복을 이루겠다는 일념에서 거사의 기회를 계책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을 기하여 하늘을 찌른 광주구국학생들의 의기가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하니 공은 그 지도자로서 앞장서서 맨주먹으로 삼엄한 일제의 총칼앞에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에 호응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수만학생들의 천지를 진동한 함성은 간악한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찔렸으며 세계만방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정신을 찬양케 하였던 것이다! 공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악형에 굴하지 않으시고 2년 9개월의 옥고로 명재 경각이 된 채 대구감옥에서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가족과 동지들의 피어린 구료의 보람도 없이 1933년 2월 16일 청춘을 조국광복을 위해 한 목숨 바치시니 27세였다! 공이 가신지 13년 만에 조국광복이 되고 1985년 8월 정부에서 공의 충혼을 기려 묘비 건립 보훈금과 고흥군 당국의 묘역 조성 지원으로 거적곡에 모셨던 유택을 분천마을 고개걸좌로 이장하고 사적비를 세웠으며! 이제 번영회의 협찬과 고흥군
당국 및 보훈처의 지원으로 과역공원에 충훈비를 세우니 여기 주향추성이 존귀감하로워 감히 이 광복회에서 명하노니 팔영산 위에 공의 충절이 높이 솟아 일월과 같이 빛나고 일생은 짧았으되 그 삶의 높은 뜻은 천년만세에 길이 빛날 것이다.
아들 병선 손 명필 선자 증손 인문은 공의 후손답게 효행을 이으니 가위득가하리로다.
대한광복 55년 기묘 원소절
광복회광주전남연합지부 지부장 송은 김상권 근찬
서기 1999년 기묘 청명절 경주 이계인 근서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용산리 780-1 면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