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용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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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과역면 과역리 666
탐방로그
애국지사 김재용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義士 金寧金公 在瑢 之碑(애국의사 김녕김공 재용 지비)
의사 김공 재용 약전
1929년의 광주 학생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사상에 영원히 빛나는 조국광복학생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영원의 불길이요 이 광주학생광복운동의 지도자였던 공의 순국의 의기는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불타리라!
공의 본은 김녕이며 휘는 재용이요 일휘 사빈이시다. 경순대왕 넷째 왕자 은열의 후예로서 관조는 고려때 김령군을 봉군받은 문열공 휘 시흥이며 단종 사화 때 고흥에 입향한 영돈녕부사 휘 준공의 20세손이며 임란
공신이신 묵제공 휘 언공공의 13세손이다. 공은 1907년 8월 일 과역면 분천에서 팔영산 정기를 받아 영만공과 밀양박씨의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셨다. 총명하고 의기강의하여 학문과 충효심이 뛰어났다. 과역보통학교 2회 졸업한 후 부안임공 영화의 따님 명례규슈와 혼인하셨다. 광주 사범학교 3년 재학중 공은 일제의 민족 탄압과 식민지 노예교육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광주고보 광종업 광주사범학교 광여고 스피아여고보생들과 모의 항일 비밀결사인 혹진회를 조직하였고 뒤이어 항일민족문화와 항일사회교육연구를 목적으로한 독서회를 조직하여 중앙위원회까지 결성하는데 주동하셨다. 공은 젊은 한 목숨 바쳐 조국 광복을 이루겠다는 일념에서 기회를 보던 중 1929년 11월 3일을 기하여 하늘을 찌른 광주구국학생들의 의가가 함께 공주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하니 공은 그 지도자로서 앞장서서 맨주먹으로 삼엄한 일제의 총칼앞에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에 호응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수만학생들의 천지에 진동한 함성은 간악한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찔렀으며 세계만방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정신을 찬양케 하였던 것이다. 공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악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2년 9개월간의 옥고로 명존 경각이 된 채 대구감옥에서 병보석으로 출옥하셨으나 가족과 동지들의 피어린 교요의 보람도 없이 1933년 2월 16일 청춘을 조국광복 위해 한 목숨 바치시니 향년 29세였다. 공이 가신 지 13년 만에 조국광복이 되고 1985년 8월 정부에서 공의 충혼을 기려 묘비 건립 보훈금과 고흥군
당국의 묘역 조경 지원으로 거족곡에 모셨던 유택을 이곳 걸좌로 이장하고 사적비를 세우니 팔영산위에 공의 충절이 높이 솟아 일월과 같이 빛나고 일생은 짧았으리 그 삶의 높은 뜻은 천추만세에 길이 빛날것이다. 아들 병선 손 명필 선자 증손 인문은 공의 후손답게 효행득가라 하리로다.
서기 1985년 중추절
전 서울고등법원부장판사 김진우 찬
대서 금곡 김병태 음기 영민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