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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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신기리 12-1
탐방로그
강진군 도암면 신기리 12-1 가우도 영랑 나루쉼터 항일민족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 좌상을 찾아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쉬이 닿는 곳 바다위를 걸어서 만나는 섬
내리는 비가 더 굵어지고 바람마저 거세어진다.

이곳에서 영랑 나루쉼터까지는 400m로 안내되어 있다. 날씨가 좋다면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데.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김영랑
오-매 단풍들것내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지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내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내

〈《시문학》 창간호, 1930.3.5.〉
강진군 도암면 신기리 12-1 가우도 영랑 나루쉼터 항일민족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 좌상을 찾아왔다.
"쉬이 닿는 곳 바다위를 걸어서 만나는 섬"
가고 싶은 섬 가우도
가고싶은 섬 가우도
[ 개요 ] 강진만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로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되고 섬의 생김새가 소(牛)의 멍에에 해당된다 하여 '가우도'라 부르게 되었다. 강진 대구면을 잇는 출렁다리(438m)와 도암면을 잇는 출렁다리(716m)에 연결되어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생태탐방로로 '함께해(海) 길'(2.5㎞)는 산과 바다를 감상하며 걷는 천혜의 트레킹 코스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 섬 스토리텔링 ]
.섬에는 약 600여 년 전부터 서쪽 부근에 고씨(高氏) 20여 호가 자리 잡고 살다가 떠나갔고, 현재는 경주김씨가 가장 많이 살고 있음
.산 정상 북쪽 8부 능선에 평평한 터가 동서로 길게(약 200m) 있는데 옛날 말 달리던 터로 '말달리'라고 불리고 있음.
.마을 뒷산 동쪽 중간지점 후박나무 군락지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堂)집(서낭당)을 마련하고 매년 정월대보름에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모셔 왔는데 6.25이후 중단되었으며 지금도 그 터가 숲속에 붕괴된 채로 흔적이 남아 있음
.매년 봄이면 마을 어귀 우물가에 마을을 상징하던 수령 500년 이상 되던 좀팽나무 아래에 풍어(風魚)를 비는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으나 나무가 고사된 후 행하여지지 않고 있음
.5월 5일 단옷날에는 수리취를 넣어서 둥글게 만든 단오떡을 만들어 조상에게 제(祭)를 지내고, 마을 화합을 위해 그네뛰기 등 여러 행사를 추진하였으나 노령화와 이농 등으로 지금은 행하여지지 않고 있음.
.또한 거북 형상인 가우도에 석양이면 학(鶴)이 모여들어 해, 산, 구름, 소나무와 함께 거북과 학이 함께 어우러진 십장생(十長生) 마을로 주민들이 장수한다고 알려졌음.
.후박나무 잎은 독성이 있어 곤충이 모여들지 않으며 껍질은 위장병 등의 약재로 쓰이는데 인근 마랑까막섬(천연기념물 제172호) 후박나무와 함께 강진의 대표적인 상록수림으로 원래 가우도에 자생하는 대표 수종이었으나 약재용으로 베어 나간 뒤 지금은 이곳 집단 군락지 외 섬 전체에 어린 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가우도의 상록수림은 물고기 떼를 해안으로 유인하는 어부림 역할을 하며 이 때문에 가우도 인근은 어족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영랑 나루쉼터까지는 400m로 안내되어 있다.
가우도 두꺼비 바위
가우도 두꺼비 바위
이 바위는 두꺼비가 엎드려 있는 듯한 형상을 하여 예로부터 두꺼비 바위라고 불립니다. 두꺼비 바위에는 가우도 주민과 얽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옛날 옛적 가우도 마을에 효심이 깊고 착한 청년이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청년은 마을 어귀를 지나다가 동네 아이들이 두꺼비 한 마리를 괴롭히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불쌍히 여긴 청년은 두꺼비를 구해주었습니다. 두꺼비는 자신을 구해준 청년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청년을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두꺼비는 청년이 병든 홀아버지를 봉양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용왕님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청년과 결혼하여 홀아버지를 함게 모실 수 있도록 간절히 빌며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바다에 빠진 두꺼비는 돌로 굳어 두꺼비바위가 되었고, 두꺼비바위 뒤에서 여자의 모습으로 떠올랐습니다. 여자가 된 두꺼비는 효심 깊은 청년과 백년가약을 맺고 홀아버지를 공경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두꺼비바위는 사랑을 이루어주는 신비한 바위라고 합니다. 두꺼비바위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를 떠올려보세요. 그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詩(시) 영랑나루 쉼터
한국 순수시 개척한 항일민족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1903.1.16~1950.9.29)은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번지에서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상경하여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영랑은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강진 4.4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靑山學院)에서 수학한 그는 용아 박용철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에는 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영랑은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당대 최고의 시인과 더불어 우리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지 제3호에 불후의 명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
영랑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 없는 '대조선인'으로 의롭게 살았다. 광복 후 신생 정부에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부상당하여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영랑은 생애 87편의 시를 남겼으며, 정부에서 2008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니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꽃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디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뻐처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읍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니고 잇술테요, 찰난한 슬픔의 봄을

〈《문학》 3호, 1934.4.1.〉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붓그림가치
詩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알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싶다.

〈《시문학》 2호, 1930.5.20.〉
동백닙에 빗나는 마을 - 김영랑

내 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내
도처오르는 아츰날빗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내
가슴엔듯 눈엔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 곳
내마음의 어듼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내

〈《시문학》 창간호, 193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