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36-12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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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55-1에 있다는 남포3.1운동기념비를 찾아왔는데, 허허벌판이다.
논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께 물어봐도 서성리 3.1운동기념비만을 알려주신다.
인터넷에 나오는 배경사진을 보면서 이곳저곳을 찾는 와중에 남포마을 입구에서 남포3.1운동기념비를 찾을 수 있었다.
GPS 상의 주소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55-13이다. 남포마을 표지석 건너편에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기 1999년 남포리 이민 일동
8월 15일 수립 건립위원
박정남 이영식 김충식 민영복 박정구 이재의 윤수일 이영록
8월 15일 수립 건립위원
박정남 이영식 김충식 민영복 박정구 이재의 윤수일 이영록
찬조자 명단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55-1에 있다는 남포3.1운동기념비를 찾아왔는데, 허허벌판이다.
논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께 물어봐도 서성리 3.1운동기념비만을 알려주신다.
논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께 물어봐도 서성리 3.1운동기념비만을 알려주신다.
인터넷에 나오는 배경사진을 보면서 이곳저곳을 찾는 와중에 남포마을 입구에서 남포3.1운동기념비를 찾을 수 있었다.
GPS 상의 주소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55-13이다. 남포마을 표지석 건너편에 있었다.
GPS 상의 주소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55-13이다. 남포마을 표지석 건너편에 있었다.
三一運動紀念碑(3.1운동기념비)
남포 독립운동 기념비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가운데 강진에서는 강진읍 장날이기도 한 4월 4일 대대적 항일독립 운동의 불을 지핀다. 이 4.4.독립운동은 당시 전남 지역 최초·최대의 항일 저항 독립 운동이었다. 3.1운동 직후인 3월 20일 민족시인 영랑 김윤식(金允植) 등 강진의 지도적 인물 12인이 극비리에 추진하던 군민봉기 거사계획은 일경의 사전 검거로 실패로 돌아간다. 다시 2차로 이기성(李基性) 등이 거사를 결정하여 강진읍 교회당에서는 독립선언문을 만들고, 이곳 남포마을에서는 박학조(朴學祖), 강주형(姜宙馨), 차명진(車明珍), 박영옥(朴英玉)을 중심으로 수 천 수 만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4일 거사 당일 남포마을의 민족 의사들은 강진의 주민들을 모으는 한편, 어물상자 속에 태극기를 대량으로 숨겨서 강진읍 장터까지 운반하였으며 마침내 정오에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일제히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시위 행진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그 날 수 백명이 다치고 강주형 등 14명이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4.4독립운동은 항일 독립운동 사상 가장 성공적인 민중 봉기였으며 전라도 각 시군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애국 주민들이 독립운동대열에 동참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가운데 강진에서는 강진읍 장날이기도 한 4월 4일 대대적 항일독립 운동의 불을 지핀다. 이 4.4.독립운동은 당시 전남 지역 최초·최대의 항일 저항 독립 운동이었다. 3.1운동 직후인 3월 20일 민족시인 영랑 김윤식(金允植) 등 강진의 지도적 인물 12인이 극비리에 추진하던 군민봉기 거사계획은 일경의 사전 검거로 실패로 돌아간다. 다시 2차로 이기성(李基性) 등이 거사를 결정하여 강진읍 교회당에서는 독립선언문을 만들고, 이곳 남포마을에서는 박학조(朴學祖), 강주형(姜宙馨), 차명진(車明珍), 박영옥(朴英玉)을 중심으로 수 천 수 만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4일 거사 당일 남포마을의 민족 의사들은 강진의 주민들을 모으는 한편, 어물상자 속에 태극기를 대량으로 숨겨서 강진읍 장터까지 운반하였으며 마침내 정오에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일제히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시위 행진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그 날 수 백명이 다치고 강주형 등 14명이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4.4독립운동은 항일 독립운동 사상 가장 성공적인 민중 봉기였으며 전라도 각 시군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애국 주민들이 독립운동대열에 동참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三一運動紀念碑(3.1운동기념비)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출신 의사
박학조(朴學祖), 차명진(車明珍), 강주형(姜宙馨), 박영옥(朴英玉) (호적명 삼례)
박학조(朴學祖), 차명진(車明珍), 강주형(姜宙馨), 박영옥(朴英玉) (호적명 삼례)
1910년 우리나라는 포악무도한 왜적으로부터 굴욕적인 침략을 받아 국권과 자유는 박탈당하여 삼천리 강산은 흡사 감옥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절망의 벼랑에서 1919년 3월 1일 분연히 궐기하여 항거하는 기미독립만세의 소식이 서울로부터 강진에 전해져 자유와 생존권을 되찾겠다는 애국심에 불을 당기었다. 이 지방에서도 지도적 인사가 거사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일경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제2차로 극비리에 거사 준비작업을 분담 추진하였다. 강진읍교회에서는 독립선언문을 만들고 남포리에서는 박학조 의사 집에서 강주형 차명진 의사의 비호 아래 박영옥 의사와 이민이 함께 수천 개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일을 4월 4일로 정하고 주민의 어물 짐 속에 태극기를 숨겨 운반하여 장꾼들에게 배포하고 정오 12시 북산에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자 폭풍노도와 같이 수천 군중의 만세함성은 지축을 흔들었고 태극기의 물결은 하늘을 덮었다. 만세행렬은 일제의 경찰서를 향해 전진하여 일경과 대치함에 해남과 장흥에서 수비대와 헌병대가 출동하여 진압하였다. 주동 인사들은 체포되어 장흥검사국으로 송치되어 학대와 고문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옥고를 당하면서도 국가독립에 대한 철석같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 4인의 의사 외에도 평소 농경어상에 종사하면서도 정의를 숭상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은 남포 선인들은 국가독립과 민족자존을 위하여 일신의 인고를 피하지 않았다. 이 자랑스러운 선열들의 기상을 기리고 만대의 후세까지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우리 모두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