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신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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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인천광역시 중구 중앙동3가 3-1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 1948년 12월 2일 찍은 제1관구경찰청 인천여자경찰서 소속 여경들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 네 번째 인물이 제2대 인천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전창신 경감이다. /사진제공=인천지방경찰청
경찰이 된 독립운동가 전창신(全昌信) 경감(1901~1985)

1946년 5월 경찰당국에서 여경찰을 모집할 때 지원 조건은 20세 이상 35세 이하의 나이, 고등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을 요구하였다. 당시 15세 이상 여성 인구 중 중학교 재학 이상 학력을 가진 여성이 2%에 불과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여경찰의 학력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층 여성들이 다시 경찰에 입문하는 배경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도 있었다.
그중 인천여자경찰서 2대 서장인 전창신(1901~1985)은 1919년 3월 함흥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1946년 조국치안의 선봉에 서기 위해 경찰이 되었다.
1950년 11월 인천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 10월 퇴임할 때까지 여성피해자 및 피난민 등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힘썼으며, 특히 경찰애육원을 설치하여 전쟁고아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 보호에 주력하였다.
퇴임 후 1981~1983년까지 3.1운동 여성동지회 8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 별세하였다. 1992년 정부는 전창신 경감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한국여자경찰육십년사, 대한민국여경재향경우회, 도서출판에스프리, 작은 불꽃, 전창신, 창조문화
인천 중구 중앙동3가 3-16 옛 인천여자경찰서 터 애국지사 전창신 선생의 기념비를 찾았다.
전창신 선생은 독립유공자이시고 독립 후에는 인천여자경찰서 2대 서장이셨다.
진정한 국민의 공복이 되겠다는 염원으로 '일제의 경찰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자'며 전국 경찰관서를 순회 강연하는 등
민주경찰의 염원을 몸소 실천했다고 한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11월 인천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한 전창신은 전쟁고아들과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을 돌보기 위한 ‘경찰애육원’을 설치하는 등 남다른 열정으로 헌신했다.
여자경찰서는 광복 후 혼란했던 1947년, 여성과 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서울·부산·대구·인천 등 4개소에 세워졌으며, 1957년까지 10년간 존속됐다.
옛 인천여자경찰서 터 / 경찰이 된 독립운동가 전창신(全昌信)
옛 인천여자경찰서 터
이곳은 인천여자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1946년 미군정은 여성·아동 등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여자경찰제도'를 도입하고, 같은 해 7월 1일 경무국 내에 여자경찰과를 신설하였다. 1947년 3월 1일 서울여자경찰서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5월 부산, 대구, 인천에 여자경찰관으로만 구성된 여자경찰서가 설치되었다.
인천여자경찰서는 처음 선화동에 세워졌으며, 초대서장으로 현주복 경감이었다. 당시 경기·인천지역을 관할하는 제1관구 경찰청 소속으로 인원은 80명 정도였으며 6.25전쟁 이후에 이곳 중앙동으로 옮겼다.
여자 경찰관의 주요업무는 성매매 단속, 청소년 지도·보호, 여성 계몽, 범죄 정보 수집 등이었다. 당시 남자경찰관이 여성의 신체를 수색하는 것을 금지하고 여성은 반드시 여자 경찰서에 수용하도록 한 점이나, 여성 사건에는 반드시 여자경찰관이 참여하도록 한 점 등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선진적인 제도였다.
여자경찰서는 여러 방면에서 맹활약하였다. 하지만 일반 경찰서와 업무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급속한 인구 팽창과 도시화로 치안환경이 변화하면서 1957년 폐지되었다. 이후 여자경찰관들은 각 경찰서에 배치되었다.
경찰이 된 독립운동가 전창신(全昌信) 경감(1901~1985)
1946년 5월 경찰당국에서 여경찰을 모집할 때 지원 조건은 20세 이상 35세 이하의 나이, 고등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을 요구하였다. 당시 15세 이상 여성 인구 중 중학교 재학 이상 학력을 가진 여성이 2%에 불과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여경찰의 학력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층 여성들이 다시 경찰에 입문하는 배경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도 있었다.
그중 인천여자경찰서 2대 서장인 전창신(1901~1985)은 1919년 3월 함흥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1946년 조국치안의 선봉에 서기 위해 경찰이 되었다.
1950년 11월 인천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 10월 퇴임할 때까지 여성피해자 및 피난민 등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힘썼으며, 특히 경찰애육원을 설치하여 전쟁고아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 보호에 주력하였다.
퇴임 후 1981~1983년까지 3.1운동 여성동지회 8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 별세하였다. 1992년 정부는 전창신 경감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한국여자경찰육십년사, 대한민국여경재향경우회, 도서출판에스프리, 작은 불꽃, 전창신, 창조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