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유도 3.1독립만세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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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인천광역시 중구 덕교동 76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용유팔경(龍游八景)
왕산낙조 旺山落照
선녀기암 仙女奇岩
비포장군 飛浦將軍
명사십리 明沙十里
오성단풍 五星丹楓
잠진어화 蚕津漁火
무의조하 舞衣朝霞
팔미귀범 八尾歸帆
산천 수려한 우리 고장 그 중에도 더 한층 뛰어난 팔경이 정기를 타고난 열 한분 님들의 넋은 오늘도 말 없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애국의 정신을 가르친다
추도시
여기 용유 팔경의 서기 머흘고 미움이 없는 대화가 맑은 바람과 더불어 흐르는 언덕
자유의 기를 흔들며 피 흘린 열한분 님들의 넋이 저기 기암 위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었네
삼월 찬 바람에 몸을 던져 산과 바다에 울리도록 외친 만세 소리
이제 비바람 지나간 하늘에 영겁으로 뻗는 웃음 되어 조국의 미래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리
인천 중구 남북동 768-1 용유중학교 옆에 있다는 용유도 3.1독립만세 기념비를 찾아갔지만,
768-1에도 없고, 용유중학교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몇 번 묻고 물어서 찾아왔다.
GPS 상의 주소는 인천 중구 덕교동 768-1이다.
三.一 獨立萬歲 紀念碑(3.1 독립만세 기념비)
삼일독립만세기념비
이 비석은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일본은 무단정치로 민족적 지도세력과 유지들의 말살정책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자각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소생하게 하였고, 조직적인 애국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시자 이는 일본이 독살한 것이라고 하여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고종황제의 국상이 3월 3일로 정해지면서 많은 국민이 서울로 모이게 되었고 마침내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탑골공원으로부터 퍼져나왔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드디어 우리고장 용유동에서도 조명원,조정서,최학봉(명교),문수현,김윤배,윤치방,윤보신(종칠),유응렬,오기섭,구길서,이난의 등 열한분이 3월 23일 혈성단을 조직하고 밤을 새워가며 대형 태극기와 격문 수백매를 만들어 거잠리,을왕리,덕교리, 남북리, 무의리의 집집마다 배포하고 궐기를 촉구했다. 약속한 그날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인 온 면민은 이 분들을 선두로 대형의 태극기를 앞세우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그 피맺힌 함성은 바다와 육지에 메아리쳤다. 비록 일본의 무력앞에 억압되고 체포되어 2년 또는 6개월의 옥고를 면하지 못하고 독립은 찾지 못했지만 드높은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의식을 세계에 선양하고 민족의 결속을 강화하는데 밑 거름이 되어 그 숭고한 뜻과 흘리신 피와 눈물로 하여금 하늘이 우리 민족을 돌아보아 광복의 날을 맞이하기에 이르렀으며 해와 달이 다하도록 그 의로운 정신 기리고 저 뜻을 모아 비를 세워 새기는 바이다.
三.一 獨立萬歲 紀念碑(3.1 독립만세 기념비)
愛國愛族(애국애족) 至誠報國(지성보국)
三.一 獨立萬歲 紀念碑(3.1 독립만세 기념비)
이 비석은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일본은 무단정치로 민족적 지도세력과 유지들의 말살정책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자각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소생하게 하였고 조직적인 애국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나시자 이는 일본이 독살한 것이라고 하여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고종 황제의 국장이 3월 3일로 정해지면서 많은 국민이 서울로 모이게 되었고 마침내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탑골공원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드디어 우리 고장 용유에서도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명교) 문무현 김윤배 윤치방 윤보신(종칠) 유응렬 오기섭 구길러 이난의 등 열한분이 3월 23일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고 밤을 세워가며 대형 태극기와 격문 수백매를 만들어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 남북리 무의리의 집집마다 배포하고 궐기를 촉구했다. 약속한 그 날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인 온 면민은 이분들을 선두로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그 피맺힌 함성은 바다와 육지에 메아리쳤다. 비록 일본의 무력 앞에 억압되고 체포되어 2년 또는 6개월의 옥고를 면하지 못하고 독립은 찾지 못했지만 드높은 한민족의 자주와 독립의식을 세계에 선양하고 민족적 결속을 강화하는데 밑거름이 되어 그 숭고한 뜻과 흘리신 피와 눈물로 하여금 하늘이 우리 민족을 돌아보아 광복의 날을 맞이하기에 이르렀으니 해와 달이 다하도록 그 의로운 정신 기리고저 뜻을 모아 비를 세워 새기는 바이다.
1983년 3월 28일 용유면 3.1 독립만세 기념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 회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