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 83-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인천 감리서 터(仁川監理署址) 인천 중구 내동 83. 건립 : 1883년/멸실 : 1927년
현재 한진아파트 일대의 부지는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의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1895년 3월부터는 이 곳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개항장 재판소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한다.
현재 한진아파트 일대의 부지는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의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1895년 3월부터는 이 곳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개항장 재판소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한다.
인천감리서 연혁 –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 83
개항 후 조선정부는 외국인 거주지 설정, 외국상인들의 출입, 선박의 입출항 및 국제교역 등 새로운 업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에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1895년 3월부터는 인천감리서 내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감리서는 갑오개혁에 따른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고종 32년(1895) 5월 26일에 일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개항장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증가되고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1896년 8월 7일 감리서가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제 국권침탈로 1906년 9월 24일 인천감리서도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그 담당 사무는 그해 10월 1일부터 통감부 이사청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개항 후 조선정부는 외국인 거주지 설정, 외국상인들의 출입, 선박의 입출항 및 국제교역 등 새로운 업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에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1895년 3월부터는 인천감리서 내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감리서는 갑오개혁에 따른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고종 32년(1895) 5월 26일에 일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개항장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증가되고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1896년 8월 7일 감리서가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제 국권침탈로 1906년 9월 24일 인천감리서도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그 담당 사무는 그해 10월 1일부터 통감부 이사청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인천 중구 내동 83-5 인천감리서 터 안내판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