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또 하나의 한글 훈맹정음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 눈 먼 사람들을 위하여 점자가 있으니 이것을 통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
- 송암 박두성 -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 눈 먼 사람들을 위하여 점자가 있으니 이것을 통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
- 송암 박두성 -
송암을 추모하며 - 노산 이은상 -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 괴인 임의 정성 어두운 가슴마다 광명을 던지셨고.
이 아침 천국에서도 같이 웃으시리라.
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리신 임
한숨을 들이켜서 입마다 노래 소리
그 공덕을 잊으리까
영원한 칭송 받으소서!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 괴인 임의 정성 어두운 가슴마다 광명을 던지셨고.
이 아침 천국에서도 같이 웃으시리라.
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리신 임
한숨을 들이켜서 입마다 노래 소리
그 공덕을 잊으리까
영원한 칭송 받으소서!
훈맹정음
6개의 점이 모여 한 칸이 된다. 6개의 점은 세로로 3점, 가로로 2점으로 구성되며, 각 점에 1에서 6까지의 번호를 붙어 사용한다. 6개의 점 중에 어떤 점을 돌출시키는지에 따라 63개의 각각 다른 점형이 생기며, 각각의 점형에 의미가 부여된 문자이다. 이처럼 훈맹정음을 무궁무진한 한글을 한정된 자원 안에서 쉽고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뛰어난 점자체계를 가지고 있다.
6개의 점이 모여 한 칸이 된다. 6개의 점은 세로로 3점, 가로로 2점으로 구성되며, 각 점에 1에서 6까지의 번호를 붙어 사용한다. 6개의 점 중에 어떤 점을 돌출시키는지에 따라 63개의 각각 다른 점형이 생기며, 각각의 점형에 의미가 부여된 문자이다. 이처럼 훈맹정음을 무궁무진한 한글을 한정된 자원 안에서 쉽고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뛰어난 점자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글점자 훈맹정음 제작과 보급 유물
① 맹사일지
② 한글점자
③ 일지
④ 촉불 88호 - 영결 김구선생
⑤ 점자 타자기
① 맹사일지
② 한글점자
③ 일지
④ 촉불 88호 - 영결 김구선생
⑤ 점자 타자기
송암 박두성 선생 일대기
박두성(朴斗星) 선생은 1888년 4월 26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에서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1895년부터 4년 동안 강화도의 보창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은 송암 선생은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어의동 보통학교에 취임하여 교직자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1911년 보창학교의 설립자 성재(誠齋) 이동휘로부터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의미의 '송암(松庵)이라는 호를 받아 남이 하지 않는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1913년 시각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학교인 조선총독부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취임하여, 시작장애인 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송암 선생은 일본어로 된 점자는 있어도 우리말을 제대로 기록할 수 있는 한글 점자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당시 평양맹아학교를 운영했던 로제타 홀(Rosetta Hall)이 개발한 4점식 한글점자가 있었지만, 초성과 종성의 자음이 구별되지 않아 글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한글점자를 만들고자 1920년 한글점자 연구에 착수했다. 1923년에는 제자 8명과 함께 '조선어점자연구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한글 창제 원리를 공부하며 한글 점자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점자 연구를 하는 통에 각막염에 걸려 자신도 하마터면 실명할 뻔하기도 하였다.
1926년 11월 4일 시행착오와 끊임없는 연구 끝에 한글점자 『훈맹정음(訓盲正音)』이 탄생했다. 훈맹정음은 배우기 쉽고, 점 수효가 적고,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는 세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자음과 모음, 숫자가 들어가 있는 서로 다른 예순세 개의 한글점자로 만들어졌다.
자음 첫소리는 기본점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자음의 받침은 자음의 첫소리를 좌우 또는 상하로 이동시켜 만들었는데, 좌우 이동이 어려운 경우는 아래로 1점씩 이동시켜 글자를 만들었다 모음은 대칭성을 이용해 글자를 만들었다. 송암 선생이 쓴 『맹사일지』에는 "점자는 어려운 것이 아니니 배우고 알기는 5분이면 족하고 읽기는 반나절에 지니지 않으며 4, 5일만 연습하면 능숙하게 쓰고 유창하게 읽을 수 있소. 어서 바삐 점자를 배워야 원하는 대로 글을 읽게 되는 것이요."라고 기록하며 쉽게 배울 수 있는 점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한글점자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을 출판하였으며, 1935년 5월에 개최된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는 처음 한글 점가 투표가 가능하게 되어 시작장애인들의 사회참여가 늘어나게 되었다. 1931년부터 점자 성경 제작에 착수하여 1941년에 점자로 된 『신양성서(新約聖書)』를 완성하였다. 1935년 제생원을 정년퇴직하고, 1936년 인천 영화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가 1939년에 사임하였다.
광복 후 제헌국회에서 한글 점자 투표를 승인받았으며, 1950년 6·25전쟁으로 신약 점자 아연판이 소실되자 다시 제작에 착수하여 1957년 『성경전서』의 점자 번역을 완성하였다. 감리교 신자로서 서울 정동교회와 인천 내리교회에 교적을 두고 맹인들을 전도하였다. 송암 선생이 마련한 교재용 점자자료는 70여 종에 달하며, 사재를 기울여 지방 각처에 통신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은 산술과목에도 정열을 기울여 시각장애인들에게 주판 교육에도 힘썼다. 이렇듯 훈맹정음 창안과 보급, 시작장애인 교육, 서적 점자 번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송암 선새은 마지막까지 "점자책 쌓지 말고 꽂아라."라고 시각장애인의 교육을 당부하며 1963년 8월 25일 7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송암 박두성 선생은 장애인교육에 무관심했던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화에서 사회에서 소위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한글 점자를 창안하여 특수교육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등 평생을 장애인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투철한 교육이념과 교육 방법, 평생 교육의 선각자로서 그 역활이 지대하였으며, 끊임없는 건학정신, 생활 자립을 위한 교육 강화, 잠재능력 개발 등에 몸과 마음을 바침으로써 대한민국 특수교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정신적 지주임과 동시에 애맹 사상가로 장애인 복지 마련에 삶을 투신하여 현재 대한민국 장애인복지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여전히 박두성 선생이 창안한 한글 점자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광복 이후에도 수정과 보완을 거쳐 사용되고 있다.
1911년 보창학교의 설립자 성재(誠齋) 이동휘로부터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의미의 '송암(松庵)이라는 호를 받아 남이 하지 않는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1913년 시각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학교인 조선총독부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취임하여, 시작장애인 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송암 선생은 일본어로 된 점자는 있어도 우리말을 제대로 기록할 수 있는 한글 점자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당시 평양맹아학교를 운영했던 로제타 홀(Rosetta Hall)이 개발한 4점식 한글점자가 있었지만, 초성과 종성의 자음이 구별되지 않아 글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한글점자를 만들고자 1920년 한글점자 연구에 착수했다. 1923년에는 제자 8명과 함께 '조선어점자연구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한글 창제 원리를 공부하며 한글 점자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점자 연구를 하는 통에 각막염에 걸려 자신도 하마터면 실명할 뻔하기도 하였다.
1926년 11월 4일 시행착오와 끊임없는 연구 끝에 한글점자 『훈맹정음(訓盲正音)』이 탄생했다. 훈맹정음은 배우기 쉽고, 점 수효가 적고,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는 세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자음과 모음, 숫자가 들어가 있는 서로 다른 예순세 개의 한글점자로 만들어졌다.
자음 첫소리는 기본점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자음의 받침은 자음의 첫소리를 좌우 또는 상하로 이동시켜 만들었는데, 좌우 이동이 어려운 경우는 아래로 1점씩 이동시켜 글자를 만들었다 모음은 대칭성을 이용해 글자를 만들었다. 송암 선생이 쓴 『맹사일지』에는 "점자는 어려운 것이 아니니 배우고 알기는 5분이면 족하고 읽기는 반나절에 지니지 않으며 4, 5일만 연습하면 능숙하게 쓰고 유창하게 읽을 수 있소. 어서 바삐 점자를 배워야 원하는 대로 글을 읽게 되는 것이요."라고 기록하며 쉽게 배울 수 있는 점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한글점자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을 출판하였으며, 1935년 5월에 개최된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는 처음 한글 점가 투표가 가능하게 되어 시작장애인들의 사회참여가 늘어나게 되었다. 1931년부터 점자 성경 제작에 착수하여 1941년에 점자로 된 『신양성서(新約聖書)』를 완성하였다. 1935년 제생원을 정년퇴직하고, 1936년 인천 영화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가 1939년에 사임하였다.
광복 후 제헌국회에서 한글 점자 투표를 승인받았으며, 1950년 6·25전쟁으로 신약 점자 아연판이 소실되자 다시 제작에 착수하여 1957년 『성경전서』의 점자 번역을 완성하였다. 감리교 신자로서 서울 정동교회와 인천 내리교회에 교적을 두고 맹인들을 전도하였다. 송암 선생이 마련한 교재용 점자자료는 70여 종에 달하며, 사재를 기울여 지방 각처에 통신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은 산술과목에도 정열을 기울여 시각장애인들에게 주판 교육에도 힘썼다. 이렇듯 훈맹정음 창안과 보급, 시작장애인 교육, 서적 점자 번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송암 선새은 마지막까지 "점자책 쌓지 말고 꽂아라."라고 시각장애인의 교육을 당부하며 1963년 8월 25일 7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송암 박두성 선생은 장애인교육에 무관심했던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화에서 사회에서 소위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한글 점자를 창안하여 특수교육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등 평생을 장애인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투철한 교육이념과 교육 방법, 평생 교육의 선각자로서 그 역활이 지대하였으며, 끊임없는 건학정신, 생활 자립을 위한 교육 강화, 잠재능력 개발 등에 몸과 마음을 바침으로써 대한민국 특수교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정신적 지주임과 동시에 애맹 사상가로 장애인 복지 마련에 삶을 투신하여 현재 대한민국 장애인복지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여전히 박두성 선생이 창안한 한글 점자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광복 이후에도 수정과 보완을 거쳐 사용되고 있다.
송암 박두성 선생 어록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고 그 언어를 잘 보존하고 있는 한 그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비록 눈은 잃었으나 우리말 우리글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실명한 사람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도 보이지 않는데 벙어리까지 되란 말인가?
장애를 방어. 제거하여 완화, 회복시킬 수 있는 원리, 방법은 오직 맹인에게 문자를 주어
그들의 정서를 순화하는 길밖에는 없다.
제대로 된 맹아 교육을 위해서는 점자 교과서가 있어야 합니다.
맹인 교육을 등한시한다면 국민에게 행복을 주기는커녕 문화 창달에 역행할 것입니다. 능한 목수는 아무리 굽은 나무라도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맹목적인 교육자는 학생의 육안을 밝히려 하기 전에 자신부터 개안하여 학생들의 심안을 밝혀야 한다.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고 그 언어를 잘 보존하고 있는 한 그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비록 눈은 잃었으나 우리말 우리글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실명한 사람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도 보이지 않는데 벙어리까지 되란 말인가?
장애를 방어. 제거하여 완화, 회복시킬 수 있는 원리, 방법은 오직 맹인에게 문자를 주어
그들의 정서를 순화하는 길밖에는 없다.
제대로 된 맹아 교육을 위해서는 점자 교과서가 있어야 합니다.
맹인 교육을 등한시한다면 국민에게 행복을 주기는커녕 문화 창달에 역행할 것입니다. 능한 목수는 아무리 굽은 나무라도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맹목적인 교육자는 학생의 육안을 밝히려 하기 전에 자신부터 개안하여 학생들의 심안을 밝혀야 한다.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 한글점자 훈맹점자((訓盲正音)' 창시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복원 생가, 흉상을 찾아가고 있다.
송암 박두성 선생의 복원 생가, 흉상을 찾아가고 있다.
훈맹정음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
(1888~1963)
송암 박두성 선생
(1888~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