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 194
- 탐방로그
- 울산 중구 서동 193 삼일사 앞에 있는 삼일 충혼비를 찾았다. 사적에 적힌 비문은 외솔 최현배 선생께서 지으신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삼일사 충혼비
기미년 3월 1일 서울에서 봉기한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이 지역 병영에서 천추의 한을 품고 순국한 엄준, 문성초,주사문,김응룡 네 분의 투사들과 투옥된 애구기사 스물두분의 업적을 기리며,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속에서 겨레의 자유정신을 세계에 선포하고자 우리고장의 청년용사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독립운동을 하던 모습을 길이 후세의 거울로 전하고자, 한글학자 최현배선생이 글을 짓고 조원규는 글을 쓰고 비에 새겨 서기 1967년 4월 5일 병영삼일사 제건 기성회(현 울산병영삼일사봉제회)가 비를 세웠다.
기미년 3월 1일 서울에서 봉기한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이 지역 병영에서 천추의 한을 품고 순국한 엄준, 문성초,주사문,김응룡 네 분의 투사들과 투옥된 애구기사 스물두분의 업적을 기리며,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속에서 겨레의 자유정신을 세계에 선포하고자 우리고장의 청년용사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독립운동을 하던 모습을 길이 후세의 거울로 전하고자, 한글학자 최현배선생이 글을 짓고 조원규는 글을 쓰고 비에 새겨 서기 1967년 4월 5일 병영삼일사 제건 기성회(현 울산병영삼일사봉제회)가 비를 세웠다.
울산 병영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순국하였거나 형을 받았던 애국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1919년 4월 4일 병영청년회 간부들은 병영일신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얻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울산 읍에서 급히 달려온 일본수비대와 순사에게 10여명이 잡혀갔다. 4월 5일에는 더욱 거센 기세로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엄준·문성초·주사문·김응룡 등이 순국하였고, 송근찬 등 31명은 중상을 입었고, 22명이 구속되어 형을 살았다.
1919년 4월 4일 병영청년회 간부들은 병영일신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얻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울산 읍에서 급히 달려온 일본수비대와 순사에게 10여명이 잡혀갔다. 4월 5일에는 더욱 거센 기세로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엄준·문성초·주사문·김응룡 등이 순국하였고, 송근찬 등 31명은 중상을 입었고, 22명이 구속되어 형을 살았다.
비문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지었다.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메, 삼천리 각처에서 우뢰같이 호응궐기하였다.
울산에서는 병영 청년회 간부 양석룡, 이현우 이종욱, 이문조, 박영하, 이종근, 김장수, 이종필 등이 몰래 모의 획책하여 4월 4일 오전 9시에 병영 일신학교 학생들의 합세를 얻어, 대한독립만세란 깃발을 앞세우고, 큰 길로 나아가다가, 울산읍에서 급히 달려온 일본 수비대와 순사 수십명에게 십여명이 잡혀갔다.
그 이튿날에는 남아 숨었던 청년히 간부들과 문성초, 윤학이, 최현구, 황정달, 백봉근들의 합동 획책으로, 전날보다 더 큰 기세로써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큰길과 성뚝으로 행진하니, 미리와서 기다리던 성밖 촌락의 많은 사람들도 함께 참가하여, 만세소리가 성안천지에 가득찼다.
노도같은 군중들은 경찰주제소로 돌진하자 때마침 울산읍으로부터 몰아닥친 수비대 일병들은 주모자 여럿이를 읍으로 잡아보낼새, 수천 군중은 한결같이 만세를 부르면서 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여 수비대를 포위하였다.
무자비한 일병의 쏘는 총탄에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용 네 열사는 그 자리에서 순사하고 송근찬, 김규식, 김두갑 서이는 중상을 입었다.
절치부심의 통분을 무엇으로 형언하랴, 이때 철창에 구속된 모두 22명에 2년 내지 6개월의 징역형을 받은이가 17명, 태형5명, 무죄2명이었다.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속에서, 겨레의 자유 정신을 세계에 선포하고자 우리고자으이 청년용사들의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하던 모습을 길이 후세의거울로 전하고자 이 충촌비를 세운다.
1967년 4월 5일 최현배는 글 짓고, 조원규는 글쓰고 새김 병영 삼일사 재건 기성회 세움.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메, 삼천리 각처에서 우뢰같이 호응궐기하였다.
울산에서는 병영 청년회 간부 양석룡, 이현우 이종욱, 이문조, 박영하, 이종근, 김장수, 이종필 등이 몰래 모의 획책하여 4월 4일 오전 9시에 병영 일신학교 학생들의 합세를 얻어, 대한독립만세란 깃발을 앞세우고, 큰 길로 나아가다가, 울산읍에서 급히 달려온 일본 수비대와 순사 수십명에게 십여명이 잡혀갔다.
그 이튿날에는 남아 숨었던 청년히 간부들과 문성초, 윤학이, 최현구, 황정달, 백봉근들의 합동 획책으로, 전날보다 더 큰 기세로써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큰길과 성뚝으로 행진하니, 미리와서 기다리던 성밖 촌락의 많은 사람들도 함께 참가하여, 만세소리가 성안천지에 가득찼다.
노도같은 군중들은 경찰주제소로 돌진하자 때마침 울산읍으로부터 몰아닥친 수비대 일병들은 주모자 여럿이를 읍으로 잡아보낼새, 수천 군중은 한결같이 만세를 부르면서 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여 수비대를 포위하였다.
무자비한 일병의 쏘는 총탄에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용 네 열사는 그 자리에서 순사하고 송근찬, 김규식, 김두갑 서이는 중상을 입었다.
절치부심의 통분을 무엇으로 형언하랴, 이때 철창에 구속된 모두 22명에 2년 내지 6개월의 징역형을 받은이가 17명, 태형5명, 무죄2명이었다.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속에서, 겨레의 자유 정신을 세계에 선포하고자 우리고자으이 청년용사들의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하던 모습을 길이 후세의거울로 전하고자 이 충촌비를 세운다.
1967년 4월 5일 최현배는 글 짓고, 조원규는 글쓰고 새김 병영 삼일사 재건 기성회 세움.
울산 중구 서동 193 삼일사 앞에 있는 삼일 충혼비를 찾아왔다.
삼일사 앞에는 삼일 충혼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