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613
- 탐방로그
- 중구 동동 613에 위치한 외솔 최현배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앞에는 외솔 최현배 선생 동상이 위치해 있으며, 기념관 주변으로 최현배 선생 생가터를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외솔 최현배 선생
외솔 최현배 선생 동상을 세우며
'한글이 목숨'을 외친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음에도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기에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드시고, 뒤이어 '우리말본. 조선어 표준어 모음. 한글갈'을 펴내셨다.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의 감옥생활을 하셨으며, 1953년에 시작된 한글 간소화 파동을 "해방 후에 사는 내 목숨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는 비장한 각오로 막아내는 등 갖은 어려움과 쓰라림을 겪으면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키며 나라사랑·겨레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이에 그 정신을 후세에 기리고자 울산 시민의 정성어린 마음을 모아, 2002년 10월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2010년 3월에 선생이 태어나 자란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웠다. 나아가 서슬 퍼런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고자 나라사랑의 길을 몸소 실천하신 외솔 선생의 기상이 어린 모습을 못내 그리워하는 모든 이를 위해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 앞으로 외솔 기념관과 동상이 울산시민과 함께 온 겨레의 거울이 되어 사랑을 받으며, 이 땅에 나라사랑·겨레사랑의 올곧은 정신을 이어가고 그 기풍을 세우기 위한 밑받침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1년 10월 19일 외솔 최현배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글이 목숨'을 외친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음에도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기에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드시고, 뒤이어 '우리말본. 조선어 표준어 모음. 한글갈'을 펴내셨다.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의 감옥생활을 하셨으며, 1953년에 시작된 한글 간소화 파동을 "해방 후에 사는 내 목숨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는 비장한 각오로 막아내는 등 갖은 어려움과 쓰라림을 겪으면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키며 나라사랑·겨레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이에 그 정신을 후세에 기리고자 울산 시민의 정성어린 마음을 모아, 2002년 10월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2010년 3월에 선생이 태어나 자란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웠다. 나아가 서슬 퍼런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되찾고자 나라사랑의 길을 몸소 실천하신 외솔 선생의 기상이 어린 모습을 못내 그리워하는 모든 이를 위해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 앞으로 외솔 기념관과 동상이 울산시민과 함께 온 겨레의 거울이 되어 사랑을 받으며, 이 땅에 나라사랑·겨레사랑의 올곧은 정신을 이어가고 그 기풍을 세우기 위한 밑받침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1년 10월 19일 외솔 최현배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
외솔 최현배선생 생가터
이 곳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선생(1894-1970)의 생가터이다. 생가는 이미 없어졌으나 2008년 복원되었다. 선생은 여기에서 태어나서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서울의 경기중고등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다. 1910년 선생은 주시경(1876~1914)이 운영하던 조선어강습소에 다니며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이 나라를 되찾는 길임을 깨닫고 이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와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등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에 전념하였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문교부 편수관, 학술원 회원, 한글학회 이사장,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대표이사, 연세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나라사랑의 정신과 겨레의 얼을 되살리는 일에 헌신하였다. 「조선민족 갱생의 도」,「우리말본」,「한글의 바른길」,「한글갈」,「한글의 투쟁」,「고등말본」,「중등말본」,「나라사랑의 길」등 많은 책을 썼다. 돌아가신 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이 곳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선생(1894-1970)의 생가터이다. 생가는 이미 없어졌으나 2008년 복원되었다. 선생은 여기에서 태어나서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서울의 경기중고등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다. 1910년 선생은 주시경(1876~1914)이 운영하던 조선어강습소에 다니며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이 나라를 되찾는 길임을 깨닫고 이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와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등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에 전념하였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문교부 편수관, 학술원 회원, 한글학회 이사장,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대표이사, 연세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나라사랑의 정신과 겨레의 얼을 되살리는 일에 헌신하였다. 「조선민족 갱생의 도」,「우리말본」,「한글의 바른길」,「한글갈」,「한글의 투쟁」,「고등말본」,「중등말본」,「나라사랑의 길」등 많은 책을 썼다. 돌아가신 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외솔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