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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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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302 석천마을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 애국지사 이재락 선생 생가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이재락 선생의 부인은 애국지사 심산 김창숙 선생의 따님이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운동가 이재락 선생 생가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
이 고택은 임란공신 이겸익의 후손인 근재공 이의창(1725~1781)이 1765년(영조 41)에 웅촌면 대대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조선 고종 때 한 차례 고치고, 1934년에 안채와 사랑채 등이 대대적으로 중수 되었다. 현재 건물은 사랑채, 안채, 사당, 아래채, 중문간 및 곳간채, 외양간, 대문간채 등이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가 중문과 담으로 나누어져 잇으며, 사랑채 앞으로 행랑채와 행랑마당(일명 작업마당)을 둔 조선후기 부농형 상류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안채 뒤에는 별도로 담을 두른 사당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에서 조산인 벼락띵이산(일명 병풍산)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 고택은 임란공신 이겸익의 후손인 근재공 이의창(1725~1781)이 1765년(영조 41)에 웅촌면 대대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조선 고종 때 한 차례 고치고, 1934년에 안채와 사랑채 등이 대대적으로 중수 되었다. 현재 건물은 사랑채, 안채, 사당, 아래채, 중문간 및 곳간채, 외양간, 대문간채 등이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가 중문과 담으로 나누어져 잇으며, 사랑채 앞으로 행랑채와 행랑마당(일명 작업마당)을 둔 조선후기 부농형 상류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안채 뒤에는 별도로 담을 두른 사당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에서 조산인 벼락띵이산(일명 병풍산)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재락 선생의 부인은 애국지사 심산 김창숙 선생의 따님이시다.
사랑채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주로 거처하면서 외부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생활공간 또는 방을 말한다.
근재공 고택의 사랑채는 자그만 규모로 지붕은 옆쪽에서 볼때에 팔작지붕 형태로 되었다.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집이다.
특히 민족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이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을 할 때, 실제로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의 사랑채에서 기거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주로 거처하면서 외부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생활공간 또는 방을 말한다.
근재공 고택의 사랑채는 자그만 규모로 지붕은 옆쪽에서 볼때에 팔작지붕 형태로 되었다.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집이다.
특히 민족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이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을 할 때, 실제로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의 사랑채에서 기거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곳간채
곳간채는 곡물 등 각종 물건을 넣어두기 위하여 창고 형태로 지은 건축물을 말한다. 광이나 고방과 같은 말이며, 별도로 독립하여 있는 경우 곳집·곳간채라 부르기도 한다.
근재공 고택의 곳간채 또한 조선 후기 일반 사대부집에서와 같은 구조를 보인다.
그러나 근재공 고택의 곳간채는 이재락 선생의 며느리이자 심산 김창숙 선생의 딸 덕기는 이재락 선생이 일본 순사에 의해 체포되는 장면을 보고 쓰러지고 난 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지 못해 깨어난 후에도 줄곧 곳간채에서 지냈다는 우리 시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곳간채는 곡물 등 각종 물건을 넣어두기 위하여 창고 형태로 지은 건축물을 말한다. 광이나 고방과 같은 말이며, 별도로 독립하여 있는 경우 곳집·곳간채라 부르기도 한다.
근재공 고택의 곳간채 또한 조선 후기 일반 사대부집에서와 같은 구조를 보인다.
그러나 근재공 고택의 곳간채는 이재락 선생의 며느리이자 심산 김창숙 선생의 딸 덕기는 이재락 선생이 일본 순사에 의해 체포되는 장면을 보고 쓰러지고 난 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지 못해 깨어난 후에도 줄곧 곳간채에서 지냈다는 우리 시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안채
안채는 살림집에서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중심 건물을 말한다.
근재공 고택의 안채는 보를 5줄로 얹어 넓이가 2칸이 되게 한 오량가구 위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면 6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또한 안채의 기둥은 일반 사대부집에서는 보기힘든 둥근 모양, 즉 원형이다.
안채 정침에서 보면 대문 쪽 방향의 조산인 벼락띠산(회야강 건너편 산)이 보이도록 집을 지어 풍수설을 따랐다고 한다.
이처럼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는 살림집에서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중심 건물을 말한다.
근재공 고택의 안채는 보를 5줄로 얹어 넓이가 2칸이 되게 한 오량가구 위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면 6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또한 안채의 기둥은 일반 사대부집에서는 보기힘든 둥근 모양, 즉 원형이다.
안채 정침에서 보면 대문 쪽 방향의 조산인 벼락띠산(회야강 건너편 산)이 보이도록 집을 지어 풍수설을 따랐다고 한다.
이처럼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근재공 고택
학성 이씨 파종가집으로 시조인 이예(李藝)의 11세손 이의창(李宜昌)이 지었다. 고종 때 이의창의 증손인 이장찬이 고쳐 지었고 1934년경 다시 전체적으로 고쳐 지었는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천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은 이 집은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갖추고 있다.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 주는 집이다.
또한 1919년 3.1운동 당시 울산 언양·병영·남창 등에서 4월 2일부터 8일까지 총 4회에 거쳐 일어났었던 독립 만세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학성 이씨 파종가집으로 시조인 이예(李藝)의 11세손 이의창(李宜昌)이 지었다. 고종 때 이의창의 증손인 이장찬이 고쳐 지었고 1934년경 다시 전체적으로 고쳐 지었는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천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은 이 집은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갖추고 있다.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 주는 집이다.
또한 1919년 3.1운동 당시 울산 언양·병영·남창 등에서 4월 2일부터 8일까지 총 4회에 거쳐 일어났었던 독립 만세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302 석천마을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 애국지사 이재락 선생 생가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안심마을 석천마을
□ 석천마을 - 울산 토성 '학성이씨' 서면파의 터전인 곳으로, 울산에 몇 남아 있지 않은 고택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이 있다. 마을은 마치 소쿠리처럼 북쪽과 서, 동쪽 삼면은 산에 감싸여 있고, 마을 앞 남쪽은 회야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어 풍수에서 말하는 길지로 뽑힌다. 석천마을은 1700년대 중반부터 '학성이씨' 서면파를 중심으로 한 씨족마을이 만들어져 울산의 대표적인 반촌 가운데 한 곳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석계서원(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과 울산에 남아 있는 고택 가운데 가장 번듯한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인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이 있다.
□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 조선 영조 41년(1765년) '근재 이의창'이 세운 '학성이씨' 서면파 종택이다. 고종 때 한 차례 고쳤고, 1934년에 대대적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의 구분이 뚜렷하고, 사당도 갖추고 있어 조선 후기 사대부 종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툇마루가 있는 사랑채는 3칸, 안채는 정면 6칸, 기둥은 사대부 집에서는 보기 힘든 원형이다. 그리고 뒷마당이 넓은 것도 눈 여겨 볼 점이다.
□ 석천마을 - 울산 토성 '학성이씨' 서면파의 터전인 곳으로, 울산에 몇 남아 있지 않은 고택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이 있다. 마을은 마치 소쿠리처럼 북쪽과 서, 동쪽 삼면은 산에 감싸여 있고, 마을 앞 남쪽은 회야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어 풍수에서 말하는 길지로 뽑힌다. 석천마을은 1700년대 중반부터 '학성이씨' 서면파를 중심으로 한 씨족마을이 만들어져 울산의 대표적인 반촌 가운데 한 곳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석계서원(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과 울산에 남아 있는 고택 가운데 가장 번듯한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인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이 있다.
□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 조선 영조 41년(1765년) '근재 이의창'이 세운 '학성이씨' 서면파 종택이다. 고종 때 한 차례 고쳤고, 1934년에 대대적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의 구분이 뚜렷하고, 사당도 갖추고 있어 조선 후기 사대부 종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툇마루가 있는 사랑채는 3칸, 안채는 정면 6칸, 기둥은 사대부 집에서는 보기 힘든 원형이다. 그리고 뒷마당이 넓은 것도 눈 여겨 볼 점이다.
울산의 대표적인 양반 집성촌
1.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석천마을 : 학성이씨 서면파의 집성촌 / 2.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명촌마을 : 경주김씨 집성촌 / 3.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사일마을 : 달성서씨 집성촌 / 4. 북구 송정동 송정마을 : 밀양박씨 집성촌
1.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석천마을 : 학성이씨 서면파의 집성촌 / 2.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명촌마을 : 경주김씨 집성촌 / 3.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사일마을 : 달성서씨 집성촌 / 4. 북구 송정동 송정마을 : 밀양박씨 집성촌
독립운동가 이재락 선생 생가
독립운동가 이재락 선생 생가
관리번호 : 41-01-19 / 관리자 : 울주군청 /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32-3
1919년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서 울산의 독립운동을 조직하여 1919년 4월 8일 남창리(南倉里)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 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1차로 2백원을 1926년경에 제공하고 2차로 8백원, 합계 1천원을 자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20만원 군자금 모금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자 192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의를 거듭하여 제2차 계획으로서 소액 응모한 부호들에게 거액 응모를 요구키로 결정하고 활동하다가 1926년 3월에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관리번호 : 41-01-19 / 관리자 : 울주군청 / 소재지 :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32-3
1919년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서 울산의 독립운동을 조직하여 1919년 4월 8일 남창리(南倉里)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 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1차로 2백원을 1926년경에 제공하고 2차로 8백원, 합계 1천원을 자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20만원 군자금 모금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자 192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의를 거듭하여 제2차 계획으로서 소액 응모한 부호들에게 거액 응모를 요구키로 결정하고 활동하다가 1926년 3월에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