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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산33
- 탐방로그
-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산 33 애국지사 정태원의 묘소를 찾았다. 산으로 들어가자마자 쉽게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정태원 선생 묘 옆에는 정태원 선생 추모비도 함께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獨立有功者 鄭泰源 居士 追慕碑(독립유공자 정태원 거사 추모비)
獨立有功者 鄭泰源 居士 追慕碑(독립유공자 정태원 거사 추모비)
공의 관은 동래, 희은공파 28세로 자는 명윤이며 무인년(1878년) 4월 22일 태어나서 한학을 수학하고 농사를 지었으나 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합방, 식민지로 되는 것을 겪으며 나라잃은 슬픔과 울분으로 나날을 보내며 지역의 유림들과 쟁론하면서 나라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으셨다. 을미년(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일어난 후 언양에서도 천도교 울산교구로 보내진 독립선언서를 받고 천도교인 최해규님 외 5인과 유림대표 이무종님이 협의하여 중진회의를 열고 항일운동거사를 4월 2일 언양 장날을 기하여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장날에 언양, 상북, 삼남, 두동, 두서 등 구 언양현의 5개면에서 모여든 군중 이천 여명은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항일운동을 벌였다. 당일 일본경찰의 무자비한 총칼에 많은 애국지사가 순직하거나 체포, 투옥되는 희생을 치렀다. 당일 41세의 장년인 공은 핵심 행동대원으로서 사재를 기부하며 활동자금을 충당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가슴에 품고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동지들과 함께 울산경찰서로 송치되어 심문을 받고 많은 고초를 당한 후에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태형 90도를 선고를 받아 울산경찰서에서 형 집행처분을 당하셨다. 출감한다는 연락을 받고 문중에서 울산까지 오십리 길을 소달구지를 끌고 가보니 볼기가 터지고 물집이 생겨 걸음을 걷지도 않지도 못하여 공은 달구지에 실려서 귀가 하셨다. 그 휴유증은 지병이 되어 남은 생애 30여년을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고 불구의 몸으로 후손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임진년(1953년) 음력 4월 8일 운명하시다. 그러나 삼일운동 기념비(1992년)에는 공의 활동내역이 기록되어 잇으나 독립운동 관련 자료의 검증이 늦어져 거사 후 90여년이 지난 2010년에야 나라에서 그 공적를 인정하고 3.1절 기념식에서 대통령표창장과 국가유공자증을 추서하였다. 아! 공의 나라를 위한 희생이 없었던들 어찌 국권을 도로 찾을 수 있었겠는가? 오늘 공의 숭고한 애국애족충정을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고 항일독립운동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 공적비를 봉헌합니다. 2012년 4월 일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954 신리마을 경로당 앞 독립유공 애국지사 정태원 공의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
독립유공 애국지사 정태원 공의 묘
독립유공 애국지사 정태원 공의 묘
정태원(1869~1953) : 대통령표창
경남 울산(蔚山)의 언양(彦陽)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경남 울산군 상남면(上南面) 길천리(吉川里)에 사는 이무종(李武鍾) 등 6명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한 후 유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해 나갔다. 이들은 의거 일자를 4월 2일 언양 장날로 정하였다. 4월 2일, 이무종 등 6인이 언양 남부리(南部里) 장터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많은 청년 동지들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시위행렬을 이끌고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들이 시위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퍼붓자,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주동인물 48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힌 정태원은 1919년 4월 10일 부산 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현재 위치: 울산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953 / 묘소 소재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산 33 / 2020년 11월 울산광역시 울주군수
정태원(1869~1953) : 대통령표창
경남 울산(蔚山)의 언양(彦陽)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경남 울산군 상남면(上南面) 길천리(吉川里)에 사는 이무종(李武鍾) 등 6명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한 후 유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해 나갔다. 이들은 의거 일자를 4월 2일 언양 장날로 정하였다. 4월 2일, 이무종 등 6인이 언양 남부리(南部里) 장터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많은 청년 동지들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시위행렬을 이끌고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들이 시위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퍼붓자,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주동인물 48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힌 정태원은 1919년 4월 10일 부산 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현재 위치: 울산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953 / 묘소 소재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산 33 / 2020년 11월 울산광역시 울주군수
독립유공 애국지사 정태원 공의 묘
상북면 신리마을
본래 언양군 하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내리라고 해서 울산(울주군) 하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28년 상북면에 편입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리(新里)라 칭하였다. 자연부락으로 신리를 위주로 재궁골, 말랑몰이 있으며, 지금은 인가가 없는 어정골로 구성되어있고,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울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23호 '지내리 지석묘'와 각종 고분이 고루 분포되어 있고,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난다는 맹맹이바위가 있다.
2014. 9.
본래 언양군 하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내리라고 해서 울산(울주군) 하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28년 상북면에 편입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리(新里)라 칭하였다. 자연부락으로 신리를 위주로 재궁골, 말랑몰이 있으며, 지금은 인가가 없는 어정골로 구성되어있고,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울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23호 '지내리 지석묘'와 각종 고분이 고루 분포되어 있고,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난다는 맹맹이바위가 있다.
2014. 9.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산 33 애국지사 정태원의 묘소를 찾았다.
산으로 들어가자 묘소가 바로 보였다.
處士 東萊鄭公 之墓(처사 동래정공 지묘)
處士 東萊鄭公 之墓(처사 동래정공 지묘)
국가유공자 증서 - 故. 정태원 / 1878.4.22 생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
2010년 9월 27일 대통령 이명박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
2010년 9월 27일 대통령 이명박
제174570호 / 표창장 - 고. 정태원
위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2010년 3월 1일 대통령 이명박
위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2010년 3월 1일 대통령 이명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