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종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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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산2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士 慶州李公 武鍾 之墓碑(의사 경주이공 무종 지묘비)
義士 慶州李公 武鍾 之墓碑(의사 경주이공 무종 지묘비)
원의경이는 자출 삼한 거족이며 적경유광이라. 혹은 충훈 혹은 학덕으로 습미전방이라. 공의 휘는 무종이요. 호는 의사로 출계 경이하니 신라 창업공신 표암공 휘 알평이 조조라. 고려 고종조에 문하평 이성암 공 휘 인 정부사공 휘 규 언양 입향조 통덕랑 휘 영과 당 임란하야 창의 의절로 진충하신 선무원종공신 훈 일등 훈련원정 휘 언량 동 일등공신 절충장군 휘 섬은 개공지직손 현조이니 세전 선련이라. 증조 휘 규호 조 휘 훈지 고 휘는 석기시며 비는 영양최씨 창우의 녀이다. 1903년 계사 5월 14일 공이 생하니 의용이 엄격하고 덕성이 화순하며 기품이 이범하여 효성이 지극하고 나라사랑의 의지가 가슴에 가득찼다. 일찌기 청운
원의경이는 자출 삼한 거족이며 적경유광이라. 혹은 충훈 혹은 학덕으로 습미전방이라. 공의 휘는 무종이요. 호는 의사로 출계 경이하니 신라 창업공신 표암공 휘 알평이 조조라. 고려 고종조에 문하평 이성암 공 휘 인 정부사공 휘 규 언양 입향조 통덕랑 휘 영과 당 임란하야 창의 의절로 진충하신 선무원종공신 훈 일등 훈련원정 휘 언량 동 일등공신 절충장군 휘 섬은 개공지직손 현조이니 세전 선련이라. 증조 휘 규호 조 휘 훈지 고 휘는 석기시며 비는 영양최씨 창우의 녀이다. 1903년 계사 5월 14일 공이 생하니 의용이 엄격하고 덕성이 화순하며 기품이 이범하여 효성이 지극하고 나라사랑의 의지가 가슴에 가득찼다. 일찌기 청운
운에 뜻을 품고 서울 휘문의숙에 진학 수학 후 향리에 돌아와 불구영달하고 양정의숙을 사설하여 후진교육에 힘쓰면서 오직 나라사랑의 일념으로 내 고장 내 손으로 내 조국 내 몸으로 보호하는 애국의 큰 길을 찾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기미 3.1독립만세운동 언양지구 의거를 주도하여 유림대표와 천도교대표 30여 명의 동지를 규합 모의하여 각기 소임을 분담 준비하고 기미 4월 2일 언양 시일을 기해 거사하여 이날 수천 민중의 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 문화민임과 독립을 온 세계에 선포하여 오천년 민족사의 이울지 않는 꽃을 싱싱히 피게 파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에 무차별 총격을 하는 일군의 만행을 항쟁타가 공은 현장에서 피포되어 2년 실형을 받고 다른 동지들도 거의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평생을 일제의 감시 압제 속에 기수 많은 나날을 지내야 했던 크나큰 희생은 불망의 경모를 입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광복 이후 정부의 혼란으로 이 멸사보국의 의절이 빛을 보지 못한 채 공은 신축 9월 15일 한많은 세상을 종하니 통탄불기로다. 기 실제인 갑종옹이 공의 3.1 유공자료를 모아 보훈당국에 청원하여 1990년 12월 26일자로 훈장증 제1856호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게 됨은 당연한 일로 축복받은 것이다. 공의 배는 경주김씨 성탁의 녀이니 남에 형우 녀서에 선원규 송석한 김정두 이만조이며 손에 형국 형렬 형길 형진이다. 여는 번불록한다. 일에 주손 형국군이 공의 묘갈을 청하니 불녕이 평소 공의 애국단충의 높은 심행을 존경하는 바라 한갓 불문을 탓하고 굳이 고사할 수 없어 머리에 행장을 적고 끝에 가시 4장을 붙여 명사에 대하기로 하였다.
지축이 흔들리고 산천초목도 떨리던 이 강산 이 고장에 태극기 휘날리며
목 터져라 절규하던 그때 그 사람들을 광음이 흘렀다 해서 어이 차마 잊으리까 정성을 함께 모아 실사를 이 빗돌에 깊이 새겨 천추에 알리노라.
서기 1991년 신미 7월 15일
학교법인 상북학원 이사장 동산 강종식 근찬 송파 윤영출 근서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565-12 후리마을 표지석 옆 독립유공 애국지사 이무종 공의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
독립유공 애국지사 이무종 공의 묘
독립유공 애국지사 이무종 공의 묘
이무종(1893~1956) : 대통령 표창
경상남도 울주(蔚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언양(彦陽)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천도교도(天道敎徒)인 그는 같은 천도교도인 이규인(李圭寅), 이성영(李成榮), 강경찬(姜庚贊), 최해선(崔海璇), 이규경(李圭庚) 등과 함께 몇차례에 걸쳐 회의를 한 후, 4월 2일의 언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러나 3월 31일 천도교인 최해규(崔海圭) 형제와 곽해진(郭海鎭). 유철순(兪哲淳) 등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일제에 예비 검속되었으나, 그는 계획을 강행하기로 결심하고 4월 1일 이규인의 집에서 이규인.최윤봉(崔允奉)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 42매를 제작하였다. 특히 4월 1일은 인근 양산읍(梁山邑)에서 수천ㅁ녕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는 4월 2일 아침 일찍 태극기를 몰래 숨겨가지고 언양읍 남부리(南部里) 장터에 나아가 그곳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6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현재 위치: 울산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565-12 / 묘소 소재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산 27 / 2020년 11월 울산광역시 울산군수
독립유공 애국지사 이무종 공의 묘
이무종(1893~1956) : 대통령 표창
경상남도 울주(蔚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언양(彦陽)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천도교도(天道敎徒)인 그는 같은 천도교도인 이규인(李圭寅), 이성영(李成榮), 강경찬(姜庚贊), 최해선(崔海璇), 이규경(李圭庚) 등과 함께 몇차례에 걸쳐 회의를 한 후, 4월 2일의 언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러나 3월 31일 천도교인 최해규(崔海圭) 형제와 곽해진(郭海鎭). 유철순(兪哲淳) 등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일제에 예비 검속되었으나, 그는 계획을 강행하기로 결심하고 4월 1일 이규인의 집에서 이규인.최윤봉(崔允奉)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 42매를 제작하였다. 특히 4월 1일은 인근 양산읍(梁山邑)에서 수천ㅁ녕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는 4월 2일 아침 일찍 태극기를 몰래 숨겨가지고 언양읍 남부리(南部里) 장터에 나아가 그곳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6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현재 위치: 울산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565-12 / 묘소 소재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산 27 / 2020년 11월 울산광역시 울산군수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산 27 애국지사 이무종의 묘소를 찾아가야 한다.
독립투사의 마을, 후리마을

후리마을은 물이 좋고 기름진 땅을 갖춘 미곡창이다. 예부터 언양현의 발상지로, 일제강점기에는 상남면(現 상북면) 면소재지였다. 지화, 후리, 오산마을에서는 독립투사가 많이 배출되엇으며 이곳은 천도교 사상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3.1만세운동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1919년(기미년) 4월 2일 수요일 오후 1시, 언양 장날을 맞아 언양, 상북, 삼남, 두동, 두서의 5개 면에서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는데, 그들 손에는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사본이 들려있었다. 등사본을 비밀리에 등사해 장터에서 나눠준 사람은 이규장, 이규천, 이규로, 이무종 등 일곱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당시 상남면소에서 등사기를 훔쳐 이무종 집에서 선언문을 등사해 병영과 남창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현재 독립운동가 이규천 선생의 후손이 후리마을에 살고 있으며 독립선언문의 필사본을 간직하고 있다.
위성지도상으로는 바로 저 위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