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호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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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1091-1
탐방로그
울산 북구 송정동 1091-1에 위치한 송정 박상진 호수공원을 찾아가고 있다. 박상진 호수 공원 내에는 고헌정, 시비, 동상이 함께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두 번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는 행운을 얻었건만
이룩한 일 하나 없이 저승길 나서려니
청산은 비웃고 물길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구나.

難復生此世上(난부생차세상)
幸得爲男子身(행득위남자신)
無一事成功去(무일사성공거)
靑山嘲綠水嚬(청산조녹수빈)
송정 박상진 호수공원
울산 북구 송정동 1091-1 송정 박상진 호수공원을 찾아가고 있다.
송정 저수지를 주변으로 송정 박상진 호수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북구 송정동 355 고헌 박상진 의사 생가가 있다. 들어오는 입구에 생가와 호수공원의 안내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수를 중심으로 전체를 돌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유시(遺詩)

어머님 상례 마치지 못했고
나랏님 원수 갚지도 못하였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죽은들 무슨 면목 있으리
박상진 선생의 호를 딴 고헌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호수에는 물고기도 많았다.
저수지가 뒤쪽으로 매우 넓다.
머리를 숙여보셨나요?
저수지에서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을 때의 거리인 것 같다.
뒤쪽 등산로와 연결이 되어있다.
박상진 선생에 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걸었기 때문에 순서를 변경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남을 돕고 베푸는 것을 좋아한 박상진 의사
박상진 의사는 성인이 되어서도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성품을 지녔다.
박상진 의사와 스승인 왕산 허위와의 인연은 향후 그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기점이 된다.
1906년 양정의숙(박상진 의사가 학교에서 토론하는 장면)
1908년 10월 허위선생 순국으로 박상진 의사의 결의는 더욱 굳건해졌다.
앞날이 보장된 판사의 길을 접고 독립운동을 위한 2년간의 여행을 시작한다.
1915년 대구 달성공원 광복회 결성식
상덕태상회에서 백야 김좌진 장군을 광복회 만주 부사령으로 임명하고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진행
광복회 비밀 회합장소인 대동상점
모친상 소식을 듣고 잡힐 것을 알고도 상을 치르러 고향집으로 온 후 일경에 체포됨.
고헌 박상진 의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며 숭고한 뜻을 이어갑시다.
좀 더 걸어가니 또 다른 벽화가 있었다. 역시 순서를 바꾸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
백야 김좌진 장군(좌)과의 상덕태상회 회의 장면
(중앙)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고헌 박상진, (좌측으로) 부사령 백야 김좌진, 백산 우재룡, 일우 김한종, 각헌 권영만, 우재 이병호, 소몽 채기중
광복회 결성 후 박상진 의사의 지시 하에 세금을 운송하는 일제 우편 마차를 탈취하는 장면
1918년 2월 1일 모친상 중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스스로 가겠다고 하며 자신의 말을 타고 가는 장면
옥중 절명시
-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難復生此世上(난부생차세상)
幸得爲男子身(행득위남자신)
無一事成功去(무일사성공거)
靑山嘲綠水嚬(청산조녹수빈)

다시 태어나기 힘든 세상에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건만
이룬 일 하나 없이 저 세상 가려하니
청산이 비웃고 녹수가 찡그리네
전별시(김좌진 만주 파견시)
-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鴨江秋日送君行(압강추일송군행)
快許丹心誓約明(쾌허단심서약명)
匣裏龍泉光射斗(갑리용천광사두)
立功指日凱歌聲(입공지일개가성)

가을 깃든 압록강 넘어 그대를 보내매
쾌히 내린 그대 단심이 우리들 서약 밝게 해주네
칼집 속의 용천검이 홀연히 빛 발할지니
이른 시일 내 공 세워 개선가 불러보세
호계역 - 조남훈

늦가을 호계역
노오란 국화꽃들 옹기종기
잇몸을 드러낸 이빨로
햇살을 물고 있다.

만남과 이별의 윤회하는
불국정토로 가는 초입
목탁 소리를 울리며
열차들이 오간다.

모든 길들이 모여드는
늦가을 호게역
선한 눈동자의 선남선녀들
모두가 부처님 얼굴로 보인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 박상진 의사의 생애 업적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898년부터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판사를 지내는 허위(許蔿)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902년 상경하였다. 1906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다. 1913년 1월 안일암(安逸庵 : 현재 대구의 安逸寺)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서 활동하였다. 1915년 7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의 인사와 합작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추대되었다. 대한광복회는 경상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만주 각지에 조직을 가지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하였다. 그는 곳곳에 곡물상을 설립해 연락 거점을 삼아, 일제 타도를 추진하는 행동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시달하였다. 박상진 등의 대한광복회는 이념에 잇어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를, 방략에 잇어서는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경주 광명리, 벌교, 해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조선총독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상진은 1916년 만주에서 무기와 화약류를 들여오다가 잡혀 6개월간의 징역형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 후 친일부호 처단을 여러 차례 계획하다가 1917년 11월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弼)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때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박상진 호수공원 관리사무소
두 번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는 행운을 얻었건만
이룩한 일 하나 없이 저승길 나서려니
청산은 비웃고 물길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구나.

難復生此世上(난부생차세상)
幸得爲男子身(행득위남자신)
無一事成功去(무일사성공거)
靑山嘲綠水嚬(청산조녹수빈)
가을 깃든 압록강 너 그대를 보내매
쾌히 내린 그대 단심이 우리들 서약 밝게 해주내
칼집 속의 용천검이 홀연히 빛 발할지니
이른 시일 내 공 세워 개선가 불러보세

鴨江秋日送君行(압강추일송군행)
快許丹心誓約明(쾌허단심서약명)
匣裏龍泉光射斗(갑리용천광사두)
立功指日凱歌聲(입공지일개가성)
가을 깃든 압록강 너 그대를 보내매
쾌히 내린 그대 단심이 우리들 서약 밝게 해주내
칼집 속의 용천검이 홀연히 빛 발할지니
이른 시일 내 공 세워 개선가 불러보세

鴨江秋日送君行(압강추일송군행)
快許丹心誓約明(쾌허단심서약명)
匣裏龍泉光射斗(갑리용천광사두)
立功指日凱歌聲(입공지일개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