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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광역시 동구 화정동 846-12
- 탐방로그
- 울산 동구 화정동 846-12 화정산 애국지사 서진문 선생 묘역을 찾아왔다. 6.25참전유공자 기념비 뒤쪽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선생이야말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삶을 살다 가신 민족의 대표적인 독립투사이다.
서기 2004년 11월 16일 서진문 선생의 서거 76주년을 맞이하여...
울산광역시 동구청
비문 작성 : 울산 동구문화원
서기 2004년 11월 16일 서진문 선생의 서거 76주년을 맞이하여...
울산광역시 동구청
비문 작성 : 울산 동구문화원
건국훈장애족장추서
서기 2006년 8월 15일
증. 대덕. 반야행
서기 2006년 8월 15일
증. 대덕. 반야행
故 徐鎭文君 之墓(고 서진문군 지묘)
一九二八年(1928년)
十一月 日 同志 立(11월 일 동지 립)
성세빈 선생께서 직접 쓰신 비석은 일산마을 바닷가에서 묘소까지 고향분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 안으시고 운반돼 온 비석이라고 한다.
一九二八年(1928년)
十一月 日 同志 立(11월 일 동지 립)
성세빈 선생께서 직접 쓰신 비석은 일산마을 바닷가에서 묘소까지 고향분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 안으시고 운반돼 온 비석이라고 한다.
故 徐鎭文君 之墓(고 서진문군 지묘)
一九二八年(1928년)
十一月 日 同志 立(11월 일 동지 립)
一九二八年(1928년)
十一月 日 同志 立(11월 일 동지 립)
울산 동구 화정동 846-12 화정산 애국지사 서진문 선생 묘역을 찾아왔다.
6.25참전유공자 기념비 뒤쪽에 있었다.
6.25참전유공자 기념비 뒤쪽에 있었다.
서진문 선생의 묘
서진문 선생(1901~1928)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209번지에서 아버지 서장식과 어머니 류남연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 후 일산사립 보성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민족의식 교육에 치중하다가 여러 번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자 야학회를 만들어 근대 여성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1926년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조선노동조합의 집행위원과 서무부장을 지냈으며, 1928년 5월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심사위원으로 재일 조선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헌신하였다. 그 후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裕仁)의 어대전(御大典) 행사를 앞두고 일본 전국에 걸친 예비검속에 의해 1928년 10월 25일 체포되었다.
선생은 요코하마(横浜)의 고또부끼(壽)지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빈사 상태가 되어 그 해 11월 16일 석방되었으나 다음날인 17일 일본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선생의 장례식은 11월 21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오열속에 전일본 노동조합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선생의 유골은 이듬해 1929년 1월 3일 가족들에 의해 고향 일산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거행하고 화정산(현 화정공원)에 모시게 되었다.
혈육으로는 유일하게 외동딸 정자를 남기셨다.
서진문 선생(1901~1928)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209번지에서 아버지 서장식과 어머니 류남연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 후 일산사립 보성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민족의식 교육에 치중하다가 여러 번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자 야학회를 만들어 근대 여성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1926년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조선노동조합의 집행위원과 서무부장을 지냈으며, 1928년 5월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심사위원으로 재일 조선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헌신하였다. 그 후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裕仁)의 어대전(御大典) 행사를 앞두고 일본 전국에 걸친 예비검속에 의해 1928년 10월 25일 체포되었다.
선생은 요코하마(横浜)의 고또부끼(壽)지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빈사 상태가 되어 그 해 11월 16일 석방되었으나 다음날인 17일 일본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선생의 장례식은 11월 21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오열속에 전일본 노동조합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선생의 유골은 이듬해 1929년 1월 3일 가족들에 의해 고향 일산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거행하고 화정산(현 화정공원)에 모시게 되었다.
혈육으로는 유일하게 외동딸 정자를 남기셨다.
서진문 선생의 묘
서진문 선생(1901~1928)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209번지에서 아버지 서장식과 어머니 류남연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 후 일산사립 보성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민족의식 교육에 치중하다가 여러 번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자 야학회를 만들어 근대 여성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1926년에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조선노동조합의 집행위원과 서무부장을 지냈으며, 1928년 5월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심사위원으로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헌신하였다. 그 후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裕仁)가 일본의 새로운 왕으로 공식 등극하는 의식인 어대전(御大典) 행사를 앞두고 일본 전국에 걸친 예비 검속에 의해 1928년 10월 25일 체포되었다. 선생은 요코하마의 고또부기(壽) 지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빈사 상태가 되어 그 해 11월 16일 수레에 실린채 석방되었으나 다음날인 17일 일본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선생의 장례식은 11월 21일 일본에 거주하는 수많은 조선인들의 오열 속에서 전일본노동조합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으며, 장례행렬이 십리 반에 달하였다. 당시 선생의 서거 소식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1929년 1월 3일 부인 윤상필 여사와 어린 딸 정자, 그리고 동생 서진화군과 함께 선생의 유골을 품에 안고 그리운 고향 일산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거행하고 화정산(현 화정공원)에 고이 모시게 되었다. 평생을 민족교육운동과 노동운동,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하신 서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