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울산광역시 동구 화정동 846-1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六.二五 參戰 國家有功子 記念塔(6.25 참전 국가유공자 기념탑)
울산 동구 화정동 846-12 서진문 선생 묘소 입구에 위치한 항일독립운동가 서진문 선생 흉상을 찾았다.
서진문 선생의 묘
서진문 선생(1901~1928)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209번지에서 아버지 서장식과 어머니 류남연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 후 일산사립 보성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민족의식 교육에 치중하다가 여러 번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자 야학회를 만들어 근대 여성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1926년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조선노동조합의 집행위원과 서무부장을 지냈으며, 1928년 5월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심사위원으로 재일 조선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헌신하였다.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의 어대전(御大典) 행사를 앞두고 일본 전국에 걸친 예비 검속에 의해 1928년 10월 25일 체포되었다.
선생은 요코하마의 고또부끼 지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빈사 상태가 되어 그 해 11월 16일 석방되었으나 다음날인 17일 일본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선생의 장례식은 11월 21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오열속에 전일본 노동조합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선생의 유골은 이듬해 1929년 1월 3일 가족들에 의해 고향 일산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거행하고 화정산(현 화정공원)에 모시게 되었다.
혈육으로는 유일하게 외동딸 정자를 남기셨다.
서진문 선생(1901~1928)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209번지에서 아버지 서장식과 어머니 류남연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 후 일산사립 보성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민족의식 교육에 치중하다가 여러 번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자 야학회를 만들어 근대 여성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1926년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조선노동조합의 집행위원과 서무부장을 지냈으며, 1928년 5월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심사위원으로 재일 조선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헌신하였다.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의 어대전(御大典) 행사를 앞두고 일본 전국에 걸친 예비 검속에 의해 1928년 10월 25일 체포되었다.
선생은 요코하마의 고또부끼 지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빈사 상태가 되어 그 해 11월 16일 석방되었으나 다음날인 17일 일본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선생의 장례식은 11월 21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오열속에 전일본 노동조합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선생의 유골은 이듬해 1929년 1월 3일 가족들에 의해 고향 일산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거행하고 화정산(현 화정공원)에 모시게 되었다.
혈육으로는 유일하게 외동딸 정자를 남기셨다.
서진문 선생 항일독립운동가
서진문 선생 항일독립운동가
아버지께서는 평소 일산진 마을 동편 해돋이 동대산(東臺山) 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면서
"바람이 쉬지 않고 항상 불고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줄 알고, 바람이 자면 내가 죽은 줄 아시오” 하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 딸 서정자의 회고록에서 -
아버지께서는 평소 일산진 마을 동편 해돋이 동대산(東臺山) 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면서
"바람이 쉬지 않고 항상 불고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줄 알고, 바람이 자면 내가 죽은 줄 아시오” 하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 딸 서정자의 회고록에서 -
서진문 선생 항일독립운동가
아버지께서는 평소 일산진 마을 동편 해돋이 동대산(東臺山) 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면서
"바람이 쉬지 않고 항상 불고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줄 알고, 바람이 자면 내가 죽은 줄 아시오” 하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 딸 서정자의 회고록에서 -
아버지께서는 평소 일산진 마을 동편 해돋이 동대산(東臺山) 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면서
"바람이 쉬지 않고 항상 불고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줄 알고, 바람이 자면 내가 죽은 줄 아시오” 하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 딸 서정자의 회고록에서 -
서진문 [1901.8.28.~1928.11.17]
울산 동면 일산하리 209번지 출생
- 독립운동가, 노동운동의 선구자 -
동면공립보통학교(현 남목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윤상필과 결혼하여 무남독녀 딸 정자 (1924년생)를 두었는데 그의 사위가 방어동 출신의 동래야류 탈 제작 중요 무형문화재 제18호 증곡 천재동 선생이다.
서진문 선생의 주요 행적
1920년 항일운동의 터전 보성학교 설립에 참여, 학교 내 여자야학회를 개설하여 여자교육에 공헌
1923년 일본 명치대 유학 중 관동조선인학살 때 중상을 당함
1925년 관동조선인학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인 노동자 규합 활동
1926년 신내천현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활동
1927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1928년 10월 25일 히로히토의 어대전(즉위식) 행사에 즈음하여 「모」 사건에 관련되어 체포
1928년 11월 16일 수감시간 22일 동안의 모진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인력거에 실려 석방되었지만 다음날 11월 17일 사망
1928년 11월 21일 일본 경찰들의 경계와 감시 속에 전일본조선인 노동조합장으로 장례식이 거행
1929년 1월 3일 선생님의 유해가 고향 일산동에 도착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현 화정공원에 안치하고 보성학교 설립자 성세빈 선생에서 대왕암공원 자연석에 직접 새긴 비석을 세움
2006년 8월 15일 국가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
울산 동면 일산하리 209번지 출생
- 독립운동가, 노동운동의 선구자 -
동면공립보통학교(현 남목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윤상필과 결혼하여 무남독녀 딸 정자 (1924년생)를 두었는데 그의 사위가 방어동 출신의 동래야류 탈 제작 중요 무형문화재 제18호 증곡 천재동 선생이다.
서진문 선생의 주요 행적
1920년 항일운동의 터전 보성학교 설립에 참여, 학교 내 여자야학회를 개설하여 여자교육에 공헌
1923년 일본 명치대 유학 중 관동조선인학살 때 중상을 당함
1925년 관동조선인학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인 노동자 규합 활동
1926년 신내천현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활동
1927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1928년 10월 25일 히로히토의 어대전(즉위식) 행사에 즈음하여 「모」 사건에 관련되어 체포
1928년 11월 16일 수감시간 22일 동안의 모진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인력거에 실려 석방되었지만 다음날 11월 17일 사망
1928년 11월 21일 일본 경찰들의 경계와 감시 속에 전일본조선인 노동조합장으로 장례식이 거행
1929년 1월 3일 선생님의 유해가 고향 일산동에 도착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현 화정공원에 안치하고 보성학교 설립자 성세빈 선생에서 대왕암공원 자연석에 직접 새긴 비석을 세움
2006년 8월 15일 국가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