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56
- 탐방로그
- 중랑구 망우동 산56에 위치한 13도 창의군탑(十三道倡義軍)은 공원묘지 바로 아래쪽에 있었다. 13도창의군은 위정척사계열 의병장의 한계성을 보여준 단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3도 창의군탑(十三道倡義軍)은 공원묘지 바로 아래쪽에 있었다.
13도 창의군탑
관리번호 11-1-1
소재지: 중랑구 망우동 망우공원
관리자: 동아일보사, 중랑구청장
규모 : 면적 15.7㎡(4.6평), 높이 15m
이 탑은 구한말인 1907년 11월 전국의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일제침략의 본거지가 있는 서울을 탈환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경기도 양주에 집결, 동대문에서 30여리 떨어진 이곳 망우리 일대에서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1년 8월 14일 동아일보사가 건립하였다.
당시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은 13도 창외대진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을,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다음해 1월 허위는 3백명의 선봉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 부대의 도착이 늦어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허위는 임진강을 근거지로 서울을 공격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이 더욱 치열해졌었다. 이곳은 비록 서울을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연합 의병들의 고귀한 뜻이 깊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관리번호 11-1-1
소재지: 중랑구 망우동 망우공원
관리자: 동아일보사, 중랑구청장
규모 : 면적 15.7㎡(4.6평), 높이 15m
이 탑은 구한말인 1907년 11월 전국의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일제침략의 본거지가 있는 서울을 탈환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경기도 양주에 집결, 동대문에서 30여리 떨어진 이곳 망우리 일대에서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1년 8월 14일 동아일보사가 건립하였다.
당시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은 13도 창외대진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을,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다음해 1월 허위는 3백명의 선봉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 부대의 도착이 늦어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허위는 임진강을 근거지로 서울을 공격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이 더욱 치열해졌었다. 이곳은 비록 서울을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연합 의병들의 고귀한 뜻이 깊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十三道倡義塔(13도창의탑)
동대문 밖 30리 이 전저리는 항일의병의 구국혼이 어리어 있는 곳이다. 일제에게 군대마져 강제해산되어 민족사가 끊어지려는 위기에 전국 의병이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1월 경기 양주땅에 집결하였다.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은 13도창의대진소를 건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을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다음해 1월 허위는 3백여명의 선봉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렸으나 후이부대의 도착이 늦어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허위는 임진강을 근거지로 서울을 공격하였으며 전국에서 의병전쟁이 더욱 치열하여졌다. 비록 서울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연합의병들의 그 큰뜻은 길이 빛나고 있다.
동대문 밖 30리 이 전저리는 항일의병의 구국혼이 어리어 있는 곳이다. 일제에게 군대마져 강제해산되어 민족사가 끊어지려는 위기에 전국 의병이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1월 경기 양주땅에 집결하였다.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은 13도창의대진소를 건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을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다음해 1월 허위는 3백여명의 선봉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렸으나 후이부대의 도착이 늦어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허위는 임진강을 근거지로 서울을 공격하였으며 전국에서 의병전쟁이 더욱 치열하여졌다. 비록 서울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연합의병들의 그 큰뜻은 길이 빛나고 있다.
동대문 밖 30리 이 전저리는 항일의병의 구국혼이 어리어 있는 곳이다. 일제에게 군대마져 강제해산되어 민족사가 끊어지려는 위기에 전국 의병이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1월 경기 양주땅에 집결하였다.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은 13도창의대진소를 건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을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다음해 1월 허위는 3백여명의 선봉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렸으나 후이부대의 도착이 늦어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허위는 임진강을 근거지로 서울을 공격하였으며 전국에서 의병전쟁이 더욱 치열하여졌다. 비록 서울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연합의병들의 그 큰뜻은 길이 빛나고 있다.
1991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1991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