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37년 평양 산정현교회 인사들과 함께 (1번이 고당, 4번이 주기철 목사)
濟濟多士
'제제다사' - 재능있는 인사들을 아끼다 (방응모 선생)
其仁爲寶
'기인위보' - 어진 것을 귀히 여기다 (조만식 선생)
■ 고당 선생 어록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하자" - 민족화합운동
"국산품 애용이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 조선물산장려운동
"나는 자유를 동경하는 북한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 민족분열을 우려하는 동포사랑
'제제다사' - 재능있는 인사들을 아끼다 (방응모 선생)
其仁爲寶
'기인위보' - 어진 것을 귀히 여기다 (조만식 선생)
■ 고당 선생 어록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하자" - 민족화합운동
"국산품 애용이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 조선물산장려운동
"나는 자유를 동경하는 북한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 민족분열을 우려하는 동포사랑
1945년 10월 14일 평양 군중집회에서 소련군 장성과 함께 자리한 고당 선생
소련 군정 치스차코프 사령관과 대좌한 조만식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 정당대회에서 개회연설을 하는 고당 선생 / 고당 선생의 지도하에 세워진 조선민주당 진남포지부의 3.1운동 기념행사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있는 고당 선생 동상 / 어린이 대공원에 세워진 고당의 동상
통일기원실 The Unification Prayer
서울 중구 저동2가 4 고당기념관을 찾았다.
고당기념관
社團法人 古堂 曺晩植 先生 紀念事業會(사단법인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고당의 연보
1883. 2.1.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에서 부친 조경학씨와 김경건 여사 사이에 외아들로 출생
1888 (6세) 이후 8년여 동안을 평양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함
1897 (15세) 이후 22세 되던 1904년까지 포목상, 지물상 등 상업에 종사함
1905 (23세)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
1908 (26세) 동년 3월 숭실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정칙 영어학교에 입학
1910 (28세) 명치대학 전문부 법학과 입학
1913 (31세) 동년 3월 명치대학 졸업후 귀국하여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1915 (33세)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
1919 (37세) 3.1운동때 강서군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
1920 (38세) 동년 1월 가석방으로 출옥한 뒤 동년 8월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추대됨
1921 (39세) 평양 YMCA 총무에 취임
1923 (41세)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에 참여
1927 (45세) 신간회 창립 때 발기인 및 중앙위원으로 참가하는 한편 신간회 평양 지회의 회장에 취임
1928 (46세) 동년 4월 숭인상업학교를 세우고 이사장에 취임
1930 (48세) 평양에서 관서체육회 회장에 취임
1932 (50세)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
1937 (554) 「수양동우회 사건」 에 연루되어 피체되었다가 20여일만에 석방됨
1944 (62세) 고향에서 은거 생활
1945 (63세) 8.15를 맞이하여 평양에서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에 추대, 동년 11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추대됨
1946 (64세)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펴다가 소련군에 의해 동년 1월 5일 평양, 고려 호텔에 연금된 이후 행방불명됨
1950.10. 6.25 당시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에 의해 평양에서 순국
1970. 8.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됨
1976.12. 어린이 대공원에 고당 동상 건립
1986. 8. 독립기념관에 고당 조만식 선생 어록비 건립
1991.11. 추모, 안장식 거행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역 안장
1992.10. 오두산 통일전망대 경내에 제2의 고당선생 동상 건립
1883. 2.1.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에서 부친 조경학씨와 김경건 여사 사이에 외아들로 출생
1888 (6세) 이후 8년여 동안을 평양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함
1897 (15세) 이후 22세 되던 1904년까지 포목상, 지물상 등 상업에 종사함
1905 (23세)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
1908 (26세) 동년 3월 숭실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정칙 영어학교에 입학
1910 (28세) 명치대학 전문부 법학과 입학
1913 (31세) 동년 3월 명치대학 졸업후 귀국하여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1915 (33세)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
1919 (37세) 3.1운동때 강서군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
1920 (38세) 동년 1월 가석방으로 출옥한 뒤 동년 8월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추대됨
1921 (39세) 평양 YMCA 총무에 취임
1923 (41세)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에 참여
1927 (45세) 신간회 창립 때 발기인 및 중앙위원으로 참가하는 한편 신간회 평양 지회의 회장에 취임
1928 (46세) 동년 4월 숭인상업학교를 세우고 이사장에 취임
1930 (48세) 평양에서 관서체육회 회장에 취임
1932 (50세)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
1937 (554) 「수양동우회 사건」 에 연루되어 피체되었다가 20여일만에 석방됨
1944 (62세) 고향에서 은거 생활
1945 (63세) 8.15를 맞이하여 평양에서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에 추대, 동년 11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추대됨
1946 (64세)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펴다가 소련군에 의해 동년 1월 5일 평양, 고려 호텔에 연금된 이후 행방불명됨
1950.10. 6.25 당시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에 의해 평양에서 순국
1970. 8.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됨
1976.12. 어린이 대공원에 고당 동상 건립
1986. 8. 독립기념관에 고당 조만식 선생 어록비 건립
1991.11. 추모, 안장식 거행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역 안장
1992.10. 오두산 통일전망대 경내에 제2의 고당선생 동상 건립
신간회 평양지회 간부들 (좌로부터 네번째 김병연 선생, 여섯번째 한근조 선생, 아홉번째 조만식 선생)
사진설명: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좌로부터)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조만식 선생 (뒷줄 오른쪽). 선생이 주례시에는 신랑, 신부도 우리의 한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