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19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 Monument of Korean Confucian Scholars' Independence Movement by Long Letter to Paris
관리번호 10-1-8 / 건립자 :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
관리자 : 남산공원관리사무소 /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산7-3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儒林)은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심문의 서한을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서한을 파리 장서(長書)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파리장서 운동에는 광범한 유림층이 참여 하였다. 기미독립선언시에 유림 대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영남, 호서, 호남의 유림이 서명에 참가하였으며 서명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외에도 자금을 모집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다.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이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다. 그는 파리장서 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서명자 규합과 파리장서 문인 작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 장서는 상해임시정부 파견 대표자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고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 투옥 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관리번호 10-1-8 / 건립자 :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
관리자 : 남산공원관리사무소 /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산7-3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儒林)은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심문의 서한을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서한을 파리 장서(長書)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파리장서 운동에는 광범한 유림층이 참여 하였다. 기미독립선언시에 유림 대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영남, 호서, 호남의 유림이 서명에 참가하였으며 서명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외에도 자금을 모집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다.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이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다. 그는 파리장서 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서명자 규합과 파리장서 문인 작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 장서는 상해임시정부 파견 대표자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고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 투옥 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관리번호 10-1-8 / 건립자 :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
관리자 : 남산공원관리사무소 /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산7-3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儒林)은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심문의 서한을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서한을 파리 장서(長書)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파리장서 운동에는 광범한 유림층이 참여 하였다. 기미독립선언시에 유림 대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영남, 호서, 호남의 유림이 서명에 참가하였으며 서명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외에도 자금을 모집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다.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이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다. 그는 파리장서 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서명자 규합과 파리장서 문인 작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 장서는 상해임시정부 파견 대표자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고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 투옥 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관리번호 10-1-8 / 건립자 :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
관리자 : 남산공원관리사무소 /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산7-3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儒林)은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심문의 서한을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서한을 파리 장서(長書)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파리장서 운동에는 광범한 유림층이 참여 하였다. 기미독립선언시에 유림 대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영남, 호서, 호남의 유림이 서명에 참가하였으며 서명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외에도 자금을 모집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다.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이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다. 그는 파리장서 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서명자 규합과 파리장서 문인 작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 장서는 상해임시정부 파견 대표자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고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 투옥 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건립기
민족의 굴욕은 죽음보다도 오히려 참기 어려우며 자유를 희구함은 생명보다도 차라리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1919년 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은 민족사 내지 세계사에 길이 끼친 불멸의 녹음이다. 33인의 서명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됨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전국적인 민족 항쟁이 일어났던 한편 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의 서명으로 일본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을 호소하는 글을 지어 김창숙이 상해로 가저가 다시 김규식으로 하여금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제출하므로써 국제의 여론을 환기시킨 일이 있었던 것이야말로 3.1운동사와 쌍벽을 일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함은 그 본시 유교의 본령이요 몸을 던저 나라를 위함은 그 또한 유교인의 신조라 역대의 의병운동에 매양 유학자들이 선봉을 섰고 특히 1895년 이래 구국운동에 피를 흘렸으며 이때에 운동도 실로 그 정신 그 신조의 발로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선열들과 관련된 동지들이 혹은 투옥 혹은 망명 그리고 혹은 순국함으로써 천지와 더부러 우뚝 한민족 정기를 한껏 발양하고 마침내 조국광복을 성취하여 국맥을 되살렸으니 우리 어찌 그 어른들의 업적을 잊을 수 있을 것이랴. 그리하여 유림들과 각계인사들이 뜻을 같이 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금과 유지들의 성금을 모아 여기에 비를 세워 파리에 보냈던 글을 새기는 뜻은 한갓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해 두자는 것이 아니라 나라 사랑하는 대의의 정신을 자손만대에 전하여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기함에 참 뜻이 있는 것이다.
서기 1973년 개천절 이은상 기문 짓고 오양 대자 쓰고 김응현 소자 쓰다.
민족의 굴욕은 죽음보다도 오히려 참기 어려우며 자유를 희구함은 생명보다도 차라리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1919년 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은 민족사 내지 세계사에 길이 끼친 불멸의 녹음이다. 33인의 서명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됨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전국적인 민족 항쟁이 일어났던 한편 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의 서명으로 일본 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을 호소하는 글을 지어 김창숙이 상해로 가저가 다시 김규식으로 하여금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제출하므로써 국제의 여론을 환기시킨 일이 있었던 것이야말로 3.1운동사와 쌍벽을 일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함은 그 본시 유교의 본령이요 몸을 던저 나라를 위함은 그 또한 유교인의 신조라 역대의 의병운동에 매양 유학자들이 선봉을 섰고 특히 1895년 이래 구국운동에 피를 흘렸으며 이때에 운동도 실로 그 정신 그 신조의 발로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선열들과 관련된 동지들이 혹은 투옥 혹은 망명 그리고 혹은 순국함으로써 천지와 더부러 우뚝 한민족 정기를 한껏 발양하고 마침내 조국광복을 성취하여 국맥을 되살렸으니 우리 어찌 그 어른들의 업적을 잊을 수 있을 것이랴. 그리하여 유림들과 각계인사들이 뜻을 같이 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금과 유지들의 성금을 모아 여기에 비를 세워 파리에 보냈던 글을 새기는 뜻은 한갓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해 두자는 것이 아니라 나라 사랑하는 대의의 정신을 자손만대에 전하여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기함에 참 뜻이 있는 것이다.
서기 1973년 개천절 이은상 기문 짓고 오양 대자 쓰고 김응현 소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