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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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산5-85
탐방로그
서울 중구 예장동 산 5-85 남산 예장공원 하부 우당 이회영 기념관을 찾았다. 지하에 주차장이 있지만, 버스만 주차가 가능하다. 통감관저 터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간 '기억의 터'에서 남산예장공원으로 가는 구름다리 길이 있었다. 이 공원 지하에 이회영 기념관이 있다. 종로구 신교동에 있었던 우당기념관이 이곳으로 이전된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울 중구 예장동 산 5-85 남산 예장공원 하부 우당 이회영 기념관을 찾았다.
지하에 주차장이 있지만, 버스만 주차가 가능하다.
남산예장공원
이회영기념관
통감관저 터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간 '기억의 터'에서 남산예장공원으로 가는 구름다리 길이 있었다.
이 공원 지하에 이회영기념관이 있었다.
종로구 신교동에 있었던 우당기념관이 이곳으로 이전된 것이다.
하지만 흉상, 사진자료 등은 아직 이전이 안되고 있었다.
이회영 기념관 李會榮 紀念館
남산 기슭 우당 友堂 이회영 李會榮 가문과는 인연과 내력이 깊은 곳이다. 경주이씨 백사공파 으뜸이 되는 백사 白沙 이항복 李恒福이 남산 북쪽에 살았다. 쌍회정이다. 백사 9대손 귤산 橘山 이유원 李裕元 은 백사가 살던 집터를 수습하여 다시 쌍회정을 회복하였다. 이곳에서 우당과 6형제 등 가솔들은 시련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뜻을 도모하였다. 쌍회정에서 몇 백 걸음에 이를 수 있는 곳에 상동교회를 세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남산자락이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작은 능선을 이루는 곳에 종현성당 鐘峴聖堂(명동성당)이 있고 그 앞쪽 일대는 저동 苧洞 이라고 한다. 갑신정변이후 청나라에서 온 위안스키 袁世凱(원세개)는 이곳에 있는 거대한 저택을 숙소로 정했다. 이회영네 집이었다. 이회영 가문이 남산자락에 남긴 흔적과 기록은 여럿이다. 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을 넘은 지 110년 만에 비로소 남산 북쪽에 돌아왔으니 이회영 기념관이다.

우당 이회영
인간 이회영의 폭은 넓었다. 막힘도 없었다. 그는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넘어 양명학(강화학파)에 몰입한 소론 출신이었다. 열 정승을 낳은 집안사람으로서 과거시험이 아니라 신학문을 절에서 공부했다. 종을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을 개가시킨 근대인이었고, 숲장수 출신 목사와 벗하면서 평민들의 교회 지하실에서 새 하늘을 도모했다. 백지 위임장(헤이그 외교독립운동)을 받을 정도로 황제와 가까우면서도 정작 공화주의자였고, 조국과 겨레를 한없이 사랑하되 주인 없는 공평한 세상. 더 많은 자유를 만인이 누리는 현실을 꿈꾼 거침없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내부에서 발견한 모순들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경계로 이동해갔다. 그는 가장 부자였고 가장 가난했다. 의로운 생각이 바로 행동이었던 그는 패배를 몰랐고 실패 또한 올랐다. 그의 피는 맑고 뜨거워 늘 순혈의 속도로 내달렸다. 가장 심연이 가장 표면이었다. 그는 자유다. 그가 곧 자유였다. 스스로가 모든 해방이었다. 그는 내내 전투체제이면서 한없이 고요했다. 호수가 활화산이었다.
그는 모든 행동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름과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스스로 잊었다. 그는 가장 앞이면서 가장 나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고, 자기 시대에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던 최후의 인간이었다.
그는 난 앞에서 칼을 얻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무장 투쟁가였다. 난초 한 이파리에 조선도, 왕도, 선비도, 민중도, 혁명도 다 들어 있었다. 그의 말과 칼과 시(묵란, 음악, 전각 등)는 하나였다.
이회영과 6형제(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6분 모두 건국훈장이 추서되셨다.
1867 - 출생
4월 21일, 서울 저동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이유승과 동래 정씨(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나다.
1885 - 18세
갑신정변(1884년) 이후 외세 침탈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관직진출이 무의미하다고 자각하고, 이상설, 려준 등과 만나 수학·역사·법학·동서양 역사 등 신학문 수학에 진학하는 한편 성리학을 넘어 양명학을 공부하다. 이 무렵 달성 서씨와 혼인하다.
1888 - 20세
적서타파, 과부재혼 장려, 노비에게 낮춤말 쓰지 않기 등을 실행하다. 누이가 정상과부가 되자 가파 초상을 치르고 은밀히 재혼토록하다.
1896 - 29세
내장원 협조를 받아 경기도 개풍군 화동 휴곡 일대 삼목 5,000여 주를 심어 삼포농장을 개척하고 양삼 시험장을 설립, 관삼을 재배하여 국가재정에 기여하다. 아들 규학이 태어나다.
1901 - 34세
일본인 70~80명이 상포농장에 침입하여 인삼을 대거 약탈한 사건이 일어나다. 이를 내장원에 보고하고 용산에서 일본으로 실려가기 직전인 인삼 12척을 되찾고 고발하다. 이면우(일본 유학생 출신)를 한국측 대리인으로 법정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공사 하야시가 화해를 요청하여 내장원경 이용익이 양해하고 형사고발을 취하하다. 인삼 전량을 회수매각하여 국고에 납입하다.
1902 - 35세
탁지부(재무통장총괄) 대신 이용익은 이회영을 탁지부 주사 겸판임관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다.
1904 - 37세
전덕기 목사 권유로 상동교회 부설학교 설립에 참여하다. 일제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전국 청년조직 건설을 절감하고 상동청년학원 원감으로 취임하여 전덕기, 주시경, 이동녕 등과 활동을 개시하다. 비밀결사 신민회를 태동시키는 계획을 세우다.
1905 - 38세
을사늑약 체결 음모 저지운동, 상동교회 청년조직을 중심으로 을사늑약 무효화 투쟁, 을사5적 처단을 도모하다.
1906 - 39세
상동교회 지하에서 전덕기, 이동녕, 양기탁과 신민회를 조직하다.
1907 - 40세
1월 중순, 부인 달성 서씨가 세상을 뜨다. 4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대표단 파견을 기획·진행하다.
1908 - 41세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상설과 신민회 향후 활동목표를 협의하다. (해외독립문기지건설, 전국적 지하조직 확대, 지방에 교육기관설립 등 계몽활동 전개)
10월, 상동교회 유일서관에서 한산 이씨 은숙과 최초로 양식 혼례를 치르다.
아들 규룡을 첫째 형 이건영에게 양자로 보내 규학이 장자가 되다.
1909 - 42세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에서 만주지역 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치를 협의하다.
1910 - 43세
여름, 종이장수 행색으로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과 서간도 일대를 둘러보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하여 12월 30일 전후로 40여 명 식솔과 동행을 지원한 노비 60여 명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
1911 - 44세
2월 초순, 서간도 류허현 삼원보에 머물다.
4월, 삼원보 추가가 대고산 아래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고 경학사 설립을 결의하다. 11월 베이징으로 가서 위안스카이 총통과 회담하여 토지매입 문제를 해결한 뒤 퉁화현에서 100여 리 떨어진 합니하를 독립군 양성기지로 결정짓고 땅을 사들이다. 경학사를 조직하고 유림대표 이상룡을 경학사장으로 추대하다.
1912 - 45세
합니다에 신흥강습소 교사를 건립하다. (교주 이석영, 교장 이철영)
1913 - 46세
3월, 신흥강습소 교장 려준과 교감 윤기섭, 무관학교 제1기 졸업생 김석, 강일수 등을 중심으로 신흥학우단을 조직하다. 해외 독립운동 구심을 만들기 위해 자금을 마련코자 단신으로 은밀히 귀국하여 제자 윤복영 집에 머물다. 3월 28일, 아들 규창이 태어나다.
1915 - 48세
8월 20일,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와 미와 와사부로에게 붙잡혔으나 가까스로 풀려난 뒤, 서울 체류 내내 일제 감시가 계속되다.
1917 - 50세
8월 30일, 아들 규학의 혼례를 빙자하여 아내 이은숙과 귀국하다.
1918 - 51세
11월, 아들 규학과 혼인하는 고종 조카딸 조계진의 신부례를 이용해 고종과 접촉하여 베이징 망명계획을 추진하다. 민영달이 5만원 자금을 지원하여 베이징에 거처까지 마련했으나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19 - 52세
고종 국장을 계기로 독립선언과 대중봉기를 계획하고 거사 직전 해외 독립운동세력 결집을 위해 베이징으로 망명하다.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25명)으로 피선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초작업에 참여하다.
5월, 신흥강습소를 고산자로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하다.
1920 - 53세
베이징으로 돌아가 가족과 합류하여 호우구로우옌에 거처하면서 신채호, 김창숙, 김규식 등과 활동하다.
1921 - 54세
4월, 아나키스트 류자명을 처음 만나다.
5월,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를 방문하고 돌아온 조소앙의 정세 보고에 실망하다.
6월, 김창숙, 신채호 등과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자유공동사회 추진운동을 전개하다.
10월, 정화암(본명 현섭)과 이을규·정규 형제와 교류하다. 정화암과 함께 베이징 근교 하천(용딩허) 부지 개발계획을 상의하고 자금모집에 나서다.
1922 - 55세
베이징 시즐먼 근처 얼옌징으로 이사하다.
아내 이은숙이 밀사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서울에서 규오를 득남(8월 17일)한 뒤 겨울에 베이징으로 돌아가다.
소설가 루쉰, 러시아 맹인 사상가이자 시인 에로센코 V. Eroshenko, 타이완 사람 판븐리앙 등과 교류하면서 자유협동사상 문제로 크게 고민하다.
1923 - 56세
신채호, 김창숙 등과 의열단 조직을 후원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다물단을 조직·지도하다.
9일, 중국 후난성 한쉐이현 양도촌에 이상촌 건립을 계획하다.
1924 - 57세
4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시원)을 조직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간하다.
1925 - 58세
3월, 거물 친일파를 처단한 다물단 활동가인 아들 규학이 상하이로 떠나고 딸 규숙이 베이징 공안국에 1년 동안 구금되다. 하루 사이로 두 손녀(규학의 딸)가 성홍열로 세상을 떠나고 며칠 뒤 아들 규오가 죽다.
7월 하순, 아내 이은숙이 귀국하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하다. 김창숙과 함께 내몽골에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다. 천안문 남쪽 용딩먼 안 관인시 후통으로 이사하다.
10월, 다물단이 또 다른 친일파 거물을 처단하다.
1926 - 59세
2월 2일, 서울에서 아내 이은숙이 막내아들 규동을 낳다. 톈진 프랑스 조계지 다지리로 이사하다.
1927 - 60세
5월, 나석주 의사의 의거 뒤 아들 규창과 함께 지난, 쉬저우 등지로 돈 한 푼 없이 떠나다.
10월경, 톈진 빈민가 진탕치아오 샤오왕장으로 돌아와 토방에 소금죽 한 그릇을 앞에 놓고 김종진(김좌진의 6촌 동생)과 아나키즘을 논의하다.
1928 - 61세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상하이)에 보낸 각국 지지를 호소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 결의안 중 하나로 채택되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베이징) 기관지 〈탈환〉에 축시를 기고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발간하는 〈동방〉 창간호에 축하 묵란을 한 폭 보내다.
〈탈환〉 발행 등을 위한 운동자금을 마련코자 일본 북큐슈 모지항을 거쳐 타이완 지룽항에 도착한 신채호(가명 류병택)가 일제 수상서원에게 체포되다.
1929 - 62세
8월,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과 한족총연합회 구성을 지원하다.
1930 - 63세
톈진 일본 조계지 중심에 있는 중일합자은행 정실은호를 털어서(장해평과 오면직(일명 양여주)은 창구, 김지강은 정문, 김동우는 후문 담당, 정화암이 후견자로 동행) 마련한 자금으로 9월에 동지들을 만주로 보내다.
1931 - 64세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인, 일본인 등 7인이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B.T.P. Black Terrorist Party)을 조직하다.
11월, 흑색공포단이 중국 국민당 친일 거두 왕징웨이를 암살코자 하다가 부관을 사살하고 아모이(샤먼)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다.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독립운동이 심대한 타격을 받는 가운데 상하이로 철수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추대됐으나 고사하고 류자명을 회장으로 추천하다.
1932 - 65세
1월, 흑색공포단이 일본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톈진 부두에서 폭파하고 톈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다.
9월, 중국인 동지 리스쩡 우쯔이 등과 상의하여 만주에서 새 거점 확보를 위해 베이징 주둔 동북민중항일총지휘부 협조 아래 다롄으로 가기로 하다.
11월 초순, 둘째 형 이석영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단신으로 상하이황푸강을 출발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다롄 수상서원에 연행되다.
11월 17일, 뤼순감옥에서 고문 끝에 순국하다.
1935 - 아들 규창이 엄순봉 의사와 함께 상하이 거류민단장으로 활동하던 친일파를 제거하고 체포되어 국내에 송환되다. (엄순봉은 사형, 이규창은 무기 구형에 13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11년 반 만에 출옥)
1948 - 8월 15일, 아우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다.
1962 - 순국 30년. 3·1절, 대한민국 정부가 이회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다.
1966 - 아내 이은숙이 〈서간도시종〉를 탈고하다. (출간 1975년)
1973 – 아들 규학이 78세로 세상을 떠나다.
1979 - 아내 이은숙이 91세로 세상을 떠나다.
2000 - 순국 68년. 1월 12일, 중화인민공화국정부가 이회영이 항일전쟁시기 중국 민중자위군의 동지로서 희생되었음을 확인하고 혁명열사증명서를수여하다.
2005 – 아들 규창이 94세로 세상을 떠나다.
2009 – 딸 규숙이 99세로 세상을 떠나다.
2014 – 막내아들 규동이 평생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89세로 세상을 떠나다. 11월 17일 순국 82주년 기일이자 을사늑약일에 이회영과 6형제의 활동을 다룬 최초 전시 〈난잎으로 칼을 얻다-우당 이회영과 6형제〉가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리다.
2017 - 광복 72주년을 맞아 우당 6형제의 독립운동을 다룬 〈민국의 길, 자유의 길〉 전시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다.
2021 - 신흥무관학교 개교 110주년, 남산예장공원에 이회영기념관을 건립하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3.1운동 이후 이회영은 베이징 北京과 텐진 天津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채호, 김창숙과 함께 베이징 독립운동세력을 이끌었다. 조선 '갑족'이라고 불렸던 이회영 식구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도 서간도 시절보다 더한 가난, 배고픔, 질병이었다. 이레에 세끼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발가락이 나오는 신발을 신고 다녀야 했던 이회영은 춥고 배고픈 겨울밤을 견디기 위해 때로 피리(대금, 퉁소, 단소)를 불곤 하였다. 사군자 四君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 으뜸이라는 묵란 墨蘭 또한 잘 쳤다. 추사 김정희에서 제자 흥선대원군 이하음으로 이어지는 필법을 익힌 이회영은 빼어난 묵란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 묵란을 내다 팔아 이회영과 동지들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곤 하였다. 먹으로 난초를 그리는 묵란 역사는 애초에 나라 잃은 선비의 기상을 말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회영은 이를 잇고 있을 뿐만 나이라 난잎을 칼로 바꿔냈으니, 예술혼과 행동이 일치를 이뤄낸 예행합일 藝行合一의 정수였다.
신흥무관학교
강근호, 김경천, 김동삼, 김산, 김원봉, 김창환, 변영태, 신팔균, 양림, 윤기섭, 윤세주, 이관직, 이동녕, 이범석, 이상룡, 이세영, 이장녕, 지청천
사진 한 장, 피 묻은 솜옷, 한 줌 재

이회영의 최후. 망명을 떠난 순간부터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제국주의 왜적에게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아나키스트 행동조직을 지속적으로 지도·운영해오던 혁명가 이회영. 그는 노구를 이끌고 중국인들과 항일공동전선 형성·지하조직망 구축을 위해 비밀리에 배(영국 배 남창호 밑바닥 4등 선실)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시사여귀 視死如歸!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
이회영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운명을 이렇게 말했다. 아들 규창이 황푸강 와이탄부두에서 전송하면서 본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렌항에서 다렌수상서 경찰에 붙잡힌 그는 곧 뤼순감옥으로 끌려갔다. 소식을 접한 동지들은 이회영을 구출코자 하였으나 손쓸 겨를이 없었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이회영은 세상을 떠났다. 유품은 솜을 누빈 따파오, 모자, 해진 신발 한 켤레가 전부였다. 예순 다섯이었다. 1932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당한 날과 날짜가 같았다. 동지들의 연락을 받은 딸 규숙이 이를 서울에 있는 어머니 이은숙에게 전보로 알렸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화장된 유해는 한 줌 재가 되어 1932년 11월 28일 경기도 장단 큰댁으로 돌아왔다.
6형제는 모두 친형제이지만, 장남이 큰집으로 양자로 가게 되었다.
서간도시종로路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는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李恩淑이 이회영과 6형제가 서울을 떠나 서간도에 세운 최초의 무장독립운동기지이자 학교인 신흥무관학교 설립과정, 베이징과 텐진 망명시절, 다시 국내 망명시절, 손녀 둘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 이회영의 죽음과 독립운동하던 아들의 투옥, 광복과 한국전쟁이후까지를 한올 한올 잇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피어린 수기다.
사대부 여인으로 남편을 따르는 일에서 출발한 그는 안팎으로 치열한 시련을 이겨내면서 마침내 독립운동가로 우뚝선다. 이 책은 서간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무장독립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삶으로 입증하고 있는 기록보고문학의 절정이다.
'서간도시종기'란 서간도의 시작과 끝을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이는 책이름이자 이회영과 6형제의 활동과 삶을 기록으로 압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전시 구성은 '서간도시종기' 노정을 따랐기에 서간도시종로路다.
서간도 가는 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베이징 짜도미 살림
삯바느질로 총을 사다
겨레의 불씨가 되다
더 이회영의 노선으로
영구 이은숙(1889~1979) 榮求 李恩淑
이은숙은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19살에 이회영과 혼인하였다. 첫 양식 혼례였다. 두 해 뒤 서간도로 독립운동의 길을 나선 그는 신흥무관학교 설립과정과 운영, 가솔을 건사하는 활동을 두루 전개하였다. 국내로 돌아와서도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는 등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이은숙은 봉건 여인에서 새로 각성되고 단련된 독립운동가로 거듭났다. 그는 고난과 시련, 굶주림과 감시로 점철된 삶 전반을 통해 결코 의지를 꺾지 않으면서 기꺼이 자기 길을 개척해 나아갔다.
〈서간도시종기〉 또한 이러한 기상에서 나왔다. 한국독립운동 기록보고문학 최고봉에 있는 〈서간도시종기〉는 생생한 내용과 품격을 갖춘 보기 드문 저술이자 독립운동가가 직접 독립운동과 자기 삶을 누비어 쓴 몇 안되는 소중한 기록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