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1
- 탐방로그
- 종로구 종로2가 38-1 탑골공원 내에 위치한 만해용운당 대선사비를 찾았다. 만해용운당 대선사비 옆으로는 3.1정신 찬양비와 10개의 3.1운동 기념부조 그리고 탑골공원 사적비가 담을 따라서 서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정신 찬양비와 10개의 3.1운동 기념부조 그리고 탑골공원 사적비가 담을 따라서 서있다.
龍雲堂 萬海 大禪師碑(용운당 만해 대선사비)
만해 용운당 대선사비
한국말년에 중북교를 도시로 끄러내어 개중화하고 아울러 쇄망하는 국운을 만회라여 민조사회를 실현하려는 큰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곧 선과 교를 능총하고 진과 속을 쌍융한 용운당 대선사이다. 선사는 서력 18879년 고종16년 기유 음 7월 12일에 충청도 홍주목 주북면 옥동 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충훈부도사 한응준의 차남으로 났으니 본관은 청주요 모는 창성방씨다. 누대의 사족으로 조 영우는 훈련원 첨정이고 증조 광후는 지중추부사였다. 사의 속명은 유천 자는 정옥이니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재중으로 유명하였고 향숙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8세에 숙사가 되어 동몽을 가르치면서 탐관오리의 침분에 시달리는 민중을 구출하여는 생각으로 동학당운동에 가담하였다. 24세에는 일본의 침략이 점점 심해지매 자유독립을 혁고히 하려는 뜻을 품고 결연이 집을 떠나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연곡 화상에게 득도하니 계명이 봉완이요 후에 건봉사의 만화선사의 법을 이어 법호를 용운이라하고 뒤에 아호를 만해라하다. 출가한 지 미구에 속가의 부와 형은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정산에서 의병을 이르키어 염포와 홍주를 점거하더니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패적하다. 1910년 경술에 원종종무원의 일간부가 일본의 조동종과 연합조약을 맺으므로 사는 영호 ?호 진응 혜찬 그몽 병인등 제사와 더불어 임제종을 주창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조국이 일본에 병합되매 내외의 정세를 살피기위하여 남북만주로 만유하다가 까막눈 이들의 오해로 해삼위 통화현에서 불의의 횡액을 당하였으나 일생에 그를 발설하지 아니하였다. 35세에는 통도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면서 불교대전을 편술하였고 36세에는 설악산 오세암에 안거하는데 臘(납)월 8일에 동사에 들어갔다
만해 용운당 대선사비
한국말년에 중북교를 도시로 끄러내어 개중화하고 아울러 쇄망하는 국운을 만회라여 민조사회를 실현하려는 큰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곧 선과 교를 능총하고 진과 속을 쌍융한 용운당 대선사이다. 선사는 서력 18879년 고종16년 기유 음 7월 12일에 충청도 홍주목 주북면 옥동 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충훈부도사 한응준의 차남으로 났으니 본관은 청주요 모는 창성방씨다. 누대의 사족으로 조 영우는 훈련원 첨정이고 증조 광후는 지중추부사였다. 사의 속명은 유천 자는 정옥이니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재중으로 유명하였고 향숙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8세에 숙사가 되어 동몽을 가르치면서 탐관오리의 침분에 시달리는 민중을 구출하여는 생각으로 동학당운동에 가담하였다. 24세에는 일본의 침략이 점점 심해지매 자유독립을 혁고히 하려는 뜻을 품고 결연이 집을 떠나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연곡 화상에게 득도하니 계명이 봉완이요 후에 건봉사의 만화선사의 법을 이어 법호를 용운이라하고 뒤에 아호를 만해라하다. 출가한 지 미구에 속가의 부와 형은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정산에서 의병을 이르키어 염포와 홍주를 점거하더니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패적하다. 1910년 경술에 원종종무원의 일간부가 일본의 조동종과 연합조약을 맺으므로 사는 영호 ?호 진응 혜찬 그몽 병인등 제사와 더불어 임제종을 주창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조국이 일본에 병합되매 내외의 정세를 살피기위하여 남북만주로 만유하다가 까막눈 이들의 오해로 해삼위 통화현에서 불의의 횡액을 당하였으나 일생에 그를 발설하지 아니하였다. 35세에는 통도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면서 불교대전을 편술하였고 36세에는 설악산 오세암에 안거하는데 臘(납)월 8일에 동사에 들어갔다
가 풍설이 요란하여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오래동안 탐구하던 의심을 깨치어 고인의 고인의 친증처에 이르고 송을 지어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一聲喝破三千界 雪裏桃花片片紅이라 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 조선민족대표33인의 일원으로 조선의 독립은 선언하고 3년동안 적옥에서 신고하였고 49세에는 신간회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의거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면서 조병옥등과 함께 민중대회를 열어 진상을 규명하고 하태를 비판하였고 이믐해에는 청년법려의 추밀단체인 만당의 영수로 추대되어 진로를 지도하면서 월간잡지 초심과 불교등을 차례로 주관하여 젊은 승려들울 계몽하고 혁신사상을 고취하였다. 일생을 통하여 시와 소설로 민족정기를 고무하다가 1944년 갑신 6월 29일 음력 5월 9일 향년 66세로 경성부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니 法臘(법랍)이 40세라 유해를 다비하여 망우리에 안장하였다. 사는 성품이 강직하고 심신이 정의로 연마되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기 몸과 같이 하며 글을 잘하고 변설에 능하여 붓과 혀로 대중을 계몽하여 자유주의사회를 건설하려고 필생에 노력하였으나 일본의 강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국의 광복을 1년 앞두고 한많은 생애를 마치었다. 저서는 불교대전 채근담강의 10현담주해 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풍후회박명등이 있고 법윤은 춘성 창림 동파 정하 용담 초안이 있고 출가전의 1자인 보국이 있었다. 사의 시조3편을 기록하여 명을 대한다.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삽살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꾹이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따슨볕 등에지고 추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밑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요. 대실로 비단짜고 솔잎으로 바늘삼아 만고청 수를 놓아 옷을 지어 두었다가 어즈버 해가 차거든 우리 님께 드리리라.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삽살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꾹이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따슨볕 등에지고 추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밑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요. 대실로 비단짜고 솔잎으로 바늘삼아 만고청 수를 놓아 옷을 지어 두었다가 어즈버 해가 차거든 우리 님께 드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