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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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The Statue of Uiam Son Byeong-Hui

관리번호 11-1-5
관리자: 종로 구청장
소재지: 종로구 종로2가 38-1 (탑골공원내)
규모: 면적 : 28.06㎡, 좌대: 가로6미터, 세로4.5미터,높이 0.5미터, 전체높이:3.3미터

동학 천도교지도자, 독립운동가, 초명은 응구(應九). 호는 의암(義菴). 본관은 밀양(密陽). 충청북도 청주(淸州) 출신. 의조(祖)의 서자이다. 1882년(고종 19) 동학에 입교하여 2년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그의 수제자로서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때 통령(統領)으로 북접(北接)의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남(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山)에서 합세하여 호남·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공주(公州)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배하자 함경도·평안도 지역으로 은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이 되어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에 힘썼으며, 1901년에는 일본을 경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개명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등을 만나 국내 사정을 듣고 1903년 귀국, 두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이들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개혁운동을 목표로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이용구(李容九)를 파견, 국내 조직에 착수하였다. 진보회는 회원 16만명을 확보하고 전 회원에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 단체 유신회(維新會)와 합한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고 을사조약에 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귀국하여 일진회와 무관함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파 62명을 출교(黜敎)하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였으며, 보성(普成)·동덕(同德)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하였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종교활동만을 전개하여 점차 교세가 약화되고 재정도 궁핍해졌다. 1908년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를 인계하고 수도에 힘쓰다가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여기 계신 이 어른은 민족의 스승이요 천도교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선생이시다. 비록 일생을 풍운 속에서 지났으되 산 같은 대의는 흔들리지 않았고 큰 뜻으로 역사를 움직여 이름을 천추에 드리운 이다. 선생은 1861년 4월 초8일 청주에서 탄생하여 22세에 동학에 들어 창생을 제도하려는 포부를 기르더니 34세에는 썩은 정치를 맑히려 혁명의 깃발을 들었고 37세에는 교조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 그리다 국치의 날을 만나서는 10년동안 투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더니 1919년 3월1일 각계대표 33인을 결속하여 국민전체의 피묻은 만세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역사 민족의 의기를 세계만방에 널리 떨치고 그로 인하여 철장의 몸이 되어 신고하다가 병으로 보석되어 1922년 5월 19일에 62세로써 환원하시었다. 우리는 정성껏 여기 이마 숙여 절하고 노래를 바친다.
정의의 채찍을 쥐고 가시밭 헤치신 이여. 자유의 횃불을 들고 길을 이끄신 이여. 겨레의 역사와 함께 길이 사시오리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깃든 곳이다. 민족의 피가 끓는 곳이다. 만족의 횃불이 들린 곳, 민족의 함성이 울린 곳이다. 자유와 정의의 샘터요 미덥고 든든한 민족혼의 고향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빛나는 행적은 3.1운동을 선구했던 일이요 또 그날 만세를 처음 외치던 곳이 여기라. 이 터에 그의 동상을 세워 우리들의 자손만대에 그 뜻과 사실을 길이 전하려 한다.
문정화는 조각하고 이은상은 글을 짓고 김충현은 글씨를 쓰고 손재형은 제자하고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이 동상을 세우다.
1966년 5월 19일
義菴 孫秉熙 先生 像(의암 손병희 선생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