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흉상,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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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36-74
탐방로그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6-74 서울보증보험 본사 정신여고 옛터 김마리아(金瑪利亞)선생 흉상을 찾았다. 이곳이 정신여고 옛터라는 흔적은 건물 뒤편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 김마리아 선생의 흉상은 현재의 정신여고에도 건립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국열사 김마리아선생 약력
1892.6.18(음)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출생
1910.6 정신여학교 4회 졸업
1915 일본 동경여자학원에 유학
1919.2.8. 2.8 독립선언운동 참여 후 선언서를 국내로 밀반입, 3.1 운동 발발에 일조
3.6 항일애국부인회 조직 계획 중 정신여학교에서 일정에 체포. 왜성대에서 악랄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옥고
9.19 출옥후 정신동지들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발족, 회장에 선임. 상해임시정부 적극 지원
11.28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의 발각으로 다시 체포. 3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구금
1922.2.18. 고문으로 인한 발병으로 병보석 치료 중, 중국 망명 성공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대의원에 선출(여성 최초의 국회의원)
1923.3.8 국민대표회의 시국문제토론회에서 임시정부의 개조 존치를 강력 주장
7.12 미국으로 재망명, 재미 교포들과 유학생들에게 독립정신 진작
1924 ~ 32 파크대학, 시카고대대학원, 콜럼비아대대학원, 뉴욕신학교에서 수학
1928.1.1 뉴욕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여성단체 근화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
1932.7 형기만료로 귀국, 일제의 거주지 제한 등으로 원산의 마르타윌슨여자신학교 교수로서 성경을 통한 독립정신 진작에 노력
1934 ~ 41 장로교여전도회 회장, 신사참배 강요를 회피 반대
1944.3.13. 고문후유증 발병으로 53세에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국
1962.3.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추서
2019년 5월 24일
(사)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SGI서울보증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순국열사 김마리아선생 흉상을 (사)김마리아기념사업회에 기증함
2019,5,24.
SGI서울보증 임직원 일동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6-74 서울보증보험 본사 정신여고 옛터 김마리아(金瑪利亞)선생 흉상을 찾았다.
이곳이 정신여고 옛터라는 흔적은 건물 뒤편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
김마리아 선생의 흉상은 현재의 정신여고에도 건립되어 있다.
본 수목이 위치한 이곳은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로서 3.1운동 당시 김마리아 선생이 영도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산실이었던 정신여고자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그리고 교과목으로 금지되었던 국사 교재들을 이 고목의 빈 구멍에 숨겨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후일 각종 비밀문서를 보존하여 역사적인 자료를 남기게 한 유서깊은 수목입니다.
순국열사 김마리아
순국열사 김마리아(1892~1944)

"대한의 독립과 결혼"한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 후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밀반입하여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전국조직 활동으로 두 번의 옥고를 겪다.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발병으로 병보석 치료 중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에 선출되다.
국민대표회의(1923년 1~6월)에 참석, 임시정부의 개조 존치를 강력 주장하다. 1923년 미국으로 재망명하여 교포사회를 향해 실력양성으로 자주독립 이루자는 연설을 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다. 1924~32년에 걸쳐 파크대학, 시카고대학원, 콜롬비아대대학원, 뉴욕신학교에서 수학학하고, 뉴욕에서 근화회를 조직하여 여성독립운동을 계속하다.
형기만료로 귀국 후, 일제의 거주제한 등으로 원산의 마르타윌슨여자신학교 교수로서 성경을 통한 애국정신 진작에 힘쓰다.
장로교전국여전도회 회장으로 활동.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1944년 순국한 선생은 대한독립의 진정한 영웅이다.
순국열사 김마리아(1892~1944)
"대한의 독립과 결혼"한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 후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밀반입하여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전국조직 활동으로 두 번의 옥고를 겪다.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발병으로 병보석 치료 중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에 선출되다.
국민대표회의(1923년 1~6월)에 참석, 임시정부의 개조 존치를 강력 주장하다. 1923년 미국으로 재망명하여 교포사회를 향해 실력양성으로 자주독립 이루자는 연설을 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다. 1924~32년에 걸쳐 파크대학, 시카고대학원, 콜롬비아대대학원, 뉴욕신학교에서 수학학하고, 뉴욕에서 근화회를 조직하여 여성독립운동을 계속하다.
형기만료로 귀국 후, 일제의 거주제한 등으로 원산의 마르타윌슨여자신학교 교수로서 성경을 통한 애국정신 진작에 힘쓰다.
장로교전국여전도회 회장으로 활동.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1944년 순국한 선생은 대한독립의 진정한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