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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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4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 영문 독립선언서
미주지역 독립 만세운동 당시 대한인국민회에서 배포한 선언서로서, 한용운을 Han Yong Woon으로 표기하였다.

▮ 3.1독립선언서(신문관판)
3.1운동 당시 배포한 독립 선언서

▮ 대한독립선언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한 것으로 3.1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과 임시헌장 10개조,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서문과 6개 정강이 실려있다.
만해 선생 동상
불교의 근대화와 독립운동
해인사 국채보상의연금 수입 공고문(대한매일신보, 1907.6.18.)
범어사 국채보상의연금 수입 공고문(대한매일신보, 1907.7.3.)
항일 승려인 백초월 등이 의천왕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시키려고 하였던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독립신문 1920.1.1.)

① 승려 독립군 김장윤이 해인사, 범어사, 김룡사 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피체된 것을 보도한 동아일보(1927.10.15.)
② 양화사 승려 신지찬이 군자금사건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피살된 사건을 보도한 독립신문(1923.7.1.)
③ 승려 독립군 김대흡, 신상완, 김상헌, 이석윤, 정인목 등이 사찰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음을 보도한 독립신문(1920.6.10.)
④ 대한독립단에 가입한 이범대가 해동불교청년회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음을 보도한 독립신문(1922.4.30.)
다솔사 만당결사의 주역들. 만당은 1932년 청년승려 김법린, 김상호, 김범술 등이 만해 한용운 스님을 총재로 추대하여 만든 항일비밀결사조직이다. 항일 민족불교 수호와 불교 발전을 목적으로 삼고, 이를 위해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편하였다.
해인사 출신 승려독립군 김봉률이 김장윤, 박달준 등과 사찰을 돌며 군자금을 모금하다 피체되었음을 보도한 독립신문(1921.3.4.)과 출옥 기념 사진.

6.10 만세운동 당시 선학원에서 한용운을, 낙원동 근처에서 항일 승려 송세호를 체포하였다는 보도기사(동아일보 1926.6.9.)

한용운 스님이 1927년 좌우합작의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7월 10일에 서울지회장에 선출되었음을 보도한 신문기사.
서울 종로구 안국동 40 중앙선원 선학원
재단법인 선학원
재단법인 선학원

1876년 개항으로 본격화된 일제의 침략책동에 편승한 일본불교는 한국불교의 예속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10년 10월, 원종 대표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동경에서 전문 7조의 연합맹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진응·한영·종래스님 등이 광주 증심사에 모여 임제종을 발기하고, 1911년 2월 3일 송광사에 조선임제종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관장 경운 원기, 관장대리 만해 용운)
1911년 6월 3일 일제는 사찰령을 제정하고 전문 7조와 부칙을 공포하여 한국불교를 왜색화 하고자 하였다. 이에 맞서 1912년 5월 2일 조선임제종 임시사무소를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으로 바꾸고 서울 사동(지금의 인사동) 28통 6호로 이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는 중앙포교당건립 방해, 임제종 칭호의 사용 금지 등 임제종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한용운, 백용성 스님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많은 승려와 불교계 인사,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특히 만해 한용운은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작성하였다. 또한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가 상해에서 11월에 국문, 중문, 영문으로 발표되어 민족불교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1921년 11월 30일 남전·도봉·석두스님 등이 만해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불교의 왜색화·세속화를 막고, 사찰령 철폐하여, 한국불교의 정맥을 수호하고 계승하기 위해 '선학원'을 설립하였다.
1922년 3월 한용운, 오성월스님 등이 선풍진작 등을 기치로 선우공제회를 창립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불교정책에 항거하는 민족불교 수호를 천명한 것이었다.

1931년 제1차 수좌대회를 계기로 선학원은 민족불교 수호와 불교대중화에 진력하였고,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연구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1935년 개최된 제3차 전국수좌대회에서 선학원이 민족불교 수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조선불교선종을 창종하였고, 1941년 유교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선학원은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54년 6월 24일 선학원에서 불교정화추진발기회를 개최하고, 다음날 교단정화운동추진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8월 24~25일 선학원에서 제1차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금오, 적음, 동산, 청담, 효봉스님 등을 정화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지도부로 선출하였다.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기점으로 종권을 비롯한 전국 각 사찰의 운영권이 비구승측으로 넘어가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해방 이후에도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전통과 민족불교를 수호하고자 했던 노력은 비구승들의 정화운동을 통하여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 조계종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선학원은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항일 "민족불교의 성지"로, 광복 후에는 왜색불교를 청산하는 "정화불교의 산실"로서 현 "대한불교조계종의 모태"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와 관련 사진으로 벽화를 만들었다.
기미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1.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와 인도,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2.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흔쾌히 발표하라.
3.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1919년 3월 1일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이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판계 수행도량, 항일민족독립운동의 구심체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창립된 선학원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 이판계(理判系) 선종(禪宗)의 지도자인 만해 한용운 스님은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21년(단기 4254) 출옥하였다. 이때 강도봉, 김남전, 김석두 스님 등 민족불교선각자들은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당시의 친일성향의 사판계(事判系)에 대응하여 이판계의 수도원(修道院)을 창립하고자 신도 최창훈 외 다수로부터 기부(寄附)를 받았다. 현재의 자리인 안국동 40번지 대지 190평을 매입하고, 1921년 11월 30일 목조기와집을 건축하였다.
이를 통해 선학원을 창립하고 만해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이 강렬한 스님과 신도가 집합하여 선의 수행에 정진하였으며, 항일민족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판결문 요약〉
입구에 있었던 재단법인 선학원 안내문과 같은 내용이었다.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
(그림 정면 우측이 만해 한용운 스님이고, 좌측이 손병희이다.)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경 서울 태화관에서 거행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 장면을 그린 기록화로, 여기서 만해 한용운 스님은 독립선언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면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채 1분도 안 걸린 연설이었지만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한 셈이었다. 그리고는 다같이 소리를 높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헌병경찰이 29명 전원을 연행하였으나 모두가 당당했고 태연하게 잡혀갔다.
(그림 정면 우측이 만해 한용운 스님이고, 좌측이 손병희이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민족대표
3.1독립선언
▮ 독립선언서(국한문)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에서 발행한 국한문 독립선언서

▮ 지옥에서 극락을 구하라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만해가 "지옥에서 극락을 구하라"는 제목으로 출옥 감상을 밝힌 보도기사(동아일보 1921.12.24). 만해 한용운은 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을 넣지 말 것 3)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세가지 옥중 투쟁 원칙을 밝혀놓고 자신이 내세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의 공약을 그대로 실천해 나갔다.

▮ 3.1독립선언서(보성사판)
3.1운동 당시 배포된 선언서로 본문은 최남선이 쓰고 공약3장은 만해 스님이 썼다.

▮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
1919년 11월 15일 상하이에서 한글(국한문), 중국어, 영어의 3개어로 발표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