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필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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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7-2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Dr,Frank William scholfield 1889~1970
Dr,Frank William scholfield 1889~1970
'34번째 푸른 눈의 민족대표' 프랭크 스코필드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는 스코필드 박사 서기 50주기를 기념하여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 일제의 탄압을 상징하는 '서대문형무소',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사저인 '경교장'을 잇는 종로-새문안로-통일로의 중심, 돈의문박물관 마을에서 스코필드기념관을 개관합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에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회로 한국이 일제의 억압 아래 있던 시기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에 담아 이를 해외에 알려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렀으며, 화성 제암리.수촌리 마을에서 자행된 학살현장을 직접 방문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해외에 폭로했습니다. 일제의 불의에 맞서다 캐나다로 돌아간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3.1만세운동 정신을 강조하며 독재 정부를 비판하고, 한국사회의 부패와 부정과 맞서 싸웠습니다.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고학하며 세계적인 수의학자로 우뚝 선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데 남은 일생을 바쳤습니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스코필드 박사는 1970년 4월 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여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강조한 희생과 봉사의 "3.1정신"은 오늘날 부패와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 정신적 독립과 진정한 자유와 의미,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에 대한 배려, 동반성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출발점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제가 보내드린 글을 The Children's Newspaper에 출간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기 불쌍한 민족을, 그들이 겪어왔고 당하고 있는 고통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프랭크 스코필드

스코필드 박사는 자신이 직접 본 것과 들은 것을 잊지 않으려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힘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한국인들의 열정에 감동하여 자신이 작성한 원고를 모아 보고서를 만들고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고문 제도와 동화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서 신문사에 보냈다. 또한 세계적인 아동 잡지를 발간하던 영국의 아더 헨리 미(Arthur Henry Mee)에게 자료를 보내 한국의 3·1운동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책상에는 언제나 편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그는 편지를 쓰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전 세계의 흩어져있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한국의 고아와 과부, 고학생 등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보내준 원조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소액일지라도 반드시 감사의 편지를 보내 끊임없이 관심과 원조를 베풀도록 만들었다.
2층 전시실
돈의문 박물관마을
돈의문
조선시대 유교의 인간 덕목 중 의(義)를 상징하는 문으로, 1396년(태조 5년)에 완공되었지만 1422년(세종 4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한양도성의 4대문(숭례문, 돈의문, 홍인지문, 숙정문) 중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강제 철거되어 유일하게 현존하지 않는 문이다. 실물 복원을 시도하였지만 천문학적인 복원 비용과 교통 상황 등의 난관으로 무산되어, 2019년 원래의 터에서 첨단 디지털 방식으로 복원을 진행하였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7-22 돈의문박물관마을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석호필) 박사 기념관을 찾았다.
돈의문 박물관마을
19 스코필드기념관
삼대가옥 - 일제강점기에 어린이날을 제정한 민족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의 삶 '누구나 아는 방정환, 내가 몰랐던 방정환'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3.1독립운동 기념전시 - 34번째 푸른 눈의 민족대표 프랭크 스코필드 / 돈의문박물관마을 스코필드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