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성 집(대각사)

4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봉익동 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대각사
대각사는 1911년 용성 진종 대종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서울 종로구 봉익동 1번지에 자리한 전통사찰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사상을 기본정신으로 한국 근대민족 불교의 산실인 대각회 근본도량이며 본부이다.
백용선사는 전라북도 장수 백남현거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상규며, 출가 후 법명을 용성이라 하였다. 어릴 적부터 선사는 불교에 마음이 끌려 승려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후 아버지를 졸라서 스님되기를 원했다. 아버지 백남현거사는 아들 상규를 1879년 해인사 극낙암 화월대사에게 보내어 낙발하였다.
해인사에서 스님이 된 후 강원에서 수학하고 전국 각 사암들을 찾아다니면서 정진하여 23세에 깨달은바가 있었고, 44세에 중국 불교계의 선지식들과도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47세에는 귀원정종과 대각교 의식집 등 수많은 저술을 하고 화엄경, 금강경, 능엄경 등 많은 경전을 번역 간행하였고, 한국불교 최초의 역경 사업을 펼쳐 불교경전의 한글대중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역경불사와 아울러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 수리 개조하여 대각사를 세우고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을 발원하여 불교계의 큰 등불이 되셨다.
용성조사는 1910년 지리산 칠불암 선원에서 안거하던 중 나라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오셨다. 그 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나라를 구하려는 동지들을 규합하고 만해 한용운 선사와 김구(법명 원종이다. 김구 선생은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4년 하였다)선생 등을 만나 나라 구하는 구체적인 논의를 하였다고 하였다. 대각사는 당시에 잘 알려지지 않는 곳으로 열혈청년들과 구국열사들의 비밀 통로 역할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한용운 선사를 통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국독립의 길을 닦으셨다. 이후 1919년 3월 1일 명월관에서 33인이 독립운동 선언을 하였고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필두로 전국 방방곡곡에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대각사는 용성대종사의 원력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찾고자 애쓰시었던 고난의 역사현장이며, 불교전법의 도량이었고, 조사님의 열반의 땅이다. 여러분들이 서있는 바로 이곳이 옛 선현들의 고뇌가 숨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불기 2556년 10월 1일
대각사 대각회 사적기
대각사 대각회 사적기

대각사는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2번지 3번지에 연하여 위치하고 있는 절이다. 십구세에 출가 이십이세에 대각의 문을 열고 선교율에 정통하여 근세 한국 불교계에 가장 큰 위업을 남긴 백용성 대종사께서 사십팔세되던 일천구백십일년 사월 파일 봉익동 2번지에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스님의 속성은 수원백씨이며 이름은 상규 법명은 진종이고 법호가 용성이다. 갑자 일천팔백육십사년 오월 팔일 전라도 남원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대각사 창건 팔년 후인 오십육세때 기미년 삼월일일 독립선언서에 서명 그로인해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삼년의 옥고를 치루고 오십팔세 봄 동감옥에서 출옥하였다. 그 후 불교의 현대화 기치를 들고 조선 세조대왕 이후 처음으로 핵심경전 번역과 반포를 위해 대각사에 삼장역회를 설립하고 이곳에서 귀원정종심조만유론 등을 저술 발간했고 이어 신역대장경 화엄경 금강경 수능엄경 금비라 동자위덕경선문촬요관정복마경 각정심관음정사총지경 대승기신론 금강삼매경 범망경 대방광원각 경육자영감대명왕경천수경 지장보살본원경 팔양경동을 번역 출간하고 아울러 대각교 의식수심정로각해 일륜청공원일팔상록수 심론석가사임종결오도는 각오도 의진리 등을 저술 간행하였다. 오십구세부터는 만주 연길명월재 등에 칠십정보의 대지를 구입 대각사 소속 포교당을 건립했고 이어 경남 함양 백전운산에 화과원을 설립 선농일치사상을 제창하였다. 대종사 육십일세 사월 이십팔일 대각사에서 불경을 보던 중 입 왼쪽에서 치사리 일과가 나왔는데 현재 경남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서편 사리탑에 모셔져 있다. 동년 불일지를 창간했고 사년 뒤 대각 일요학교를 설립 삼장 역회 기관지 인무아지를 간행하였다. 그 이듬해 대각사에 참선하는 모임의 선회를 개설하여 역경포교 등 중생 교화에 힘쓰시다 일천구백사십년 이월 이십사일대 열반에 드시니 세수가 칠십칠세요 법람이 오십구세다. 일천구백삼십년 말 대종사 육십칠세때 대각성전 이십육평요사체 이십오평을 신축하였고 일천구백육십오년 회암주지때 이층영각상하이십평을 지었다. 조국광복 후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던 김구 선생과 임원들의 귀국 봉영회를 이곳에서 개최하였고 일천구백육십이년 정부에서는 대종사께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복장(제5호)을 추서하였다. 역대 주지로는 창건주지백용성대종사 2대 회암일천구백사십년부터 오십삼년까지 3대 소천 오십삼년부터 오십사년까지 4대 동암 오십사년부터 오십오년까지 5대 회암오십오년부터 칠십사년까지 6대 효경 칠십사년부터 팔십팔년 현재까지의 4 임기를 역임하는 동안 신도 불자들
의 정성으로 기존 법당 이십육평에서 사십오평으로 증축했고 요사채 이십오평에서 칠십평으로 증축 기존 대지 일백팔십이평에서 일백십육평을 매입 총 이백구십팔평으로 확장했다. 일천구백팔십오년 시월부터 일천구백팔십육년 십일월까지 대각사 도량내 기존 건물을 철거 지하 일층 지상 삼층 총 건평 사백평으로 신축하고 범종각 이층 일십평을 신축 대각의 종일천관주조와 일십오평을 신축하였다. 창건시 모셨던 석불상은 중생사로 이안하고 새로 삼존금동불상과 상중단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대종사 오십팔세 되던 일천구백이십일년에 봉익동 2번지에 대각교회를 창립한 정신을 기리고 대각사상을 현창키 위해 일천구백육십구년 구월 십일일 재단법인 대각회를 봉익동 3번지에 설립하였다. 초대 임원으로 이사장에 동헌 이사에 고암 자운 동암 소천 성철 회암 보경도 원광덕 성옹 도문 수길 형하 감사에 능가 혜총 김성칠 제2대 임원으로 이사장에 광덕 이사에 자운 고암동 헌회암 도문석 옹보경 효경 보광 감사에 지관 제3대 임원으로 선효 4~5대 이사장에 자운 회암스님의 입적으로 4대 지관동헌스님 자리를 5대도 업석옹 스님의 뒤를 흥교가 이었고 감사에 여환 보광사무국장에는 대각회 설립시부터 현재까지 이태석씨가 맡고 있다. 용성 대종사께서 선농일치사상을 제창하면서 실천도량으로 개설했던 많은 농지를 이일제의 압력으로 신탁되어 모두 유실되었고 화과원만이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에서 망실되었던 것을 선효화상이 임야 사십일만오백오십평밭 사천일백사십칠평 등의 전답을 찾아 대각회에 환원시켰다. 또 농막관리소 건물 등을 화과원으로 등기하고 전기불사 등을 하였다. 대각사를 거쳐간 분 중 고승 대덕으로는 동산 회암 고암동 헌소천 자운동 암덕산 정산 능가 광덕 홍철 운문 스님 등이 있다. 동산 스님은 한국불교 정
화 이후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셨고 고암스님도 조계종 종정을 3대를 연임하였다. 대각회를 설립한 창립 초대 이사장으로 동헌스님이 일천구백육십년부터 십오년간 대각회를 이끌었고 이어 회암스님이 2대 주지로부로 부임 6.25의 참화를 딛고 입적할때까지 대각사를 수호했으며 자운스님은 조게종 총무원장 등 종단요직을 거쳐 일천구백칠십육년부터 팔십칠년까지 십이년간 대각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대각사 발전의 기틀을 다지셨다. 능가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일년부터 십육년동안 세계불교지도자대회와 해외 포교에 주력하였고 광덕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이년부터 팔십사년까지 대각사에서 용성스님의 뒤를 이어 현대불교 포교의 횃불을 들고 불광법회와 불광출판 불광사를 창립문서 포교의 일환으로 많은 저술을 하여 정화 이후 한국불교 포교의 새장을 열었으며 홍철법주는 일천구백오십구년에 룸비니를 창립 중고대학생 포교의 선봉으로 룸비니를 독립하여 이끌고 운문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이년 어린이 법회를 설립하여 어린이 불자 양성에 주력하다 운문사를 창건시 무중이며 도문스님은 용성 대종사의 많은 저술을 대각회 출판부 발행으로 복간하여 반포에 힘쓰며 그 밖의 자운스님 편역경전과 많은 분들의 역저를 대각회 출판부 이름으로 간행하고 있다. 또 대각회 소속사원으로 등기된 분원으로 서울에 금강사 성덕사 기원사 보명선원 육화사 불광사 본원정 사향림 선원 불광 반야 원법 안정사가 경기도에 문수암 영원선원 개원사 정토사가 있고 충남에 연실사 법정사 효광선원 법성선원 학림선원이 경북에 보광사 대구에 대자비 원백련 포교원 부산에 감로사 구룡사 대법사 금수선원 장천사 대각선원 경덕 염불원 경남에 청송사 화과원 여래원 반야선원 제월선원 반야선원 전북에 자혜선원 전남에 선응선원 제주도에 양진선원 남국선원 보문선원이 있다. 본부의 기본 재산으론 대각회 부지 일백삼평 대각사 부지 일백구십오평 대각성 전회관 사백평 일주문 일십오평 범종각 2층 일십평이 있다. 대각성전 건물은 세월이 흘러 신도수가 늘어나도 위로 몇 층을 더 올려 지을 수 있도록 기초와 골격을 튼튼히 하였고 돌담장과 정원 공사 법당 내의 닫집탁자영단각 건물 단청에 이르기까지 모두 새롭게 단장된 것이다.

대각도량 자비광명 누리의 어둠 밝힐 제 대종사 가르침을 큰 거울로 걸어서 대각하늘 오가는 구름 마음 비워 헤리라
불기 이천오백삼십이년 사월 초파일
단기 사천삼백이십일년(서기 일천구백팔십팔년)

비구 효경 글을 짓고 불자 고평석 글씨 쓰고 주인철 도안하고 이송재 조각하다
서울 종로구 봉익동 2 대각사를 찾아가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용성대종사 유적지 대각사 전통사찰
大覺寺(대각사)
용성(龍城) 스님 거주터(居住址)
3.1운동 민족대표 33중의 한 분으로 불교 혁신 운동을 펼친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이 활동하던 곳.
3.1 독립운동 성지(聖地) 대각사
대각사는 민족해방운동을 위하여 용성(龍城)스님이 세운 절이다. 용성(龍城)스님은 48세인 1911년부터 1940년까지 빼앗긴 조선독립을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열반하실 때까지 민중의 깨우침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일제치하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전체를 다 던지고 거기에 전념하였다.
용성(龍城)스님은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매진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서울 사동에서 선불교 교화사업을 맡아 일하면서 봉익동 1번지 일대를 사들여 독립운동의 성지 대각사를 세우고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1912년 이때 김구 선생의 나이는 32세. 용성(龍城)스님은 49세이다. 1919년 김구 선생은 해주에서 대한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인천감옥으로 이관되고 거기서 탈옥한다. 그리고 대신 부모가 투옥되고 백범은 삼남으로 도피, 그해 늦가을 마곡사(麻谷寺)에서 스님이 되고 圓宗(원종)이란 법명을 얻고 3년을 거기서 수행하였다. 금강산 평양 대보산 영천암 등에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환속하게 된다. 그 후 원종圓宗(원종) 김구 선생은 서울에 오면 언제든지 용성스님이 있는 대각사에 머물며 용성스님의 영향을 받아 우리 민족 살릴 대원(大願)을 세우고 보현행원을 실천할 행자가 되기를 스스로 다짐하였다. 후에 김구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게 되었고 용성스님은 김구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곤 하였다.
용성(龍城)스님은 1916년 봄 만해(卍海)스님을 불러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자주 묻곤 하였다. 만해선사는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대각사에 머물면서 용성(龍城)스님께 시국 돌아가는 말씀을 나누고 차후 거사를 계획하였다고 한다. 그때쯤 손병희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은 조선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물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영국 미국 러시아 등에 밀사를 보내 독립운동을 하고 또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조선 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일을 할 때였다.
용성스님은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대표로 참여하였고, 이것을 문제 삼아 2년여 간의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갖은 옥고를 다 치렀다. 출소 후 용성스님 께서는 경전 번역과 전법, 그리고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경남 함양의 화과원(華果園) 운영, 만주 용정에 27만여 평의 농지를 구입하여 화과원(華果園)을 운영, 잉여농산물은 모두 독립자금과 만주독립군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그런 일로 후일 1931년에는 대각사가 일본 조선 총독부에 재산몰수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으나 일본의 조선박해와 압제에 굴하지 않고 조선해방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용성스님은 끝내 조선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음력 2월 24일에 대각사 에서 열반하시었다. 다비식은 일본경찰의 철저한 방해와 수색 검열 등으로 제자 몇 분만이 스님의 다비식을 조촐하게 치렀으며 스님의 사리탑은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 산록에 세워졌다.
이곳 대각사는 용성조사님 전법과 열반의 땅이며 3.1독립운동의 성지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대각회 총본산 대각사 주지 백
龍城禪院(용성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