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5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진관사 칠성각
칠성각은 1907년(융희 1)에 지어진 것으로 불교에 흡수된 민간신앙인 칠성신을 모신 건물이다. 진관사는 1900년대 초 크게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한전과 독성전, 칠성각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예로부터 북두칠성은 재물과 재능을 주고, 수명을 관장하며, 비를 내려 풍년을 들게 하는 신으로 민간에서 널리 받들었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으로 그 구조는 아주 간소하다. 안에는 뒷벽에 붙여서 불단을 놓고, 석불좌상과 칠성도, 영정 1점을 모셨다. 석불좌상은 조선 후게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신체와 얼굴 모두 아기처럼 작게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천불상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10년에 제작된 칠성도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칠성과 여러 성군을 그린 불화다. 진관사는 1012년(고려 현종 3) 정쟁에 휘말린 현종을 도운 진관대사를 위해 세운 절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를 열었던 수륙도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칠성각은 1907년(융희 1)에 지어진 것으로 불교에 흡수된 민간신앙인 칠성신을 모신 건물이다. 진관사는 1900년대 초 크게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한전과 독성전, 칠성각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예로부터 북두칠성은 재물과 재능을 주고, 수명을 관장하며, 비를 내려 풍년을 들게 하는 신으로 민간에서 널리 받들었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으로 그 구조는 아주 간소하다. 안에는 뒷벽에 붙여서 불단을 놓고, 석불좌상과 칠성도, 영정 1점을 모셨다. 석불좌상은 조선 후게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신체와 얼굴 모두 아기처럼 작게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천불상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10년에 제작된 칠성도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칠성과 여러 성군을 그린 불화다. 진관사는 1012년(고려 현종 3) 정쟁에 휘말린 현종을 도운 진관대사를 위해 세운 절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를 열었던 수륙도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독성전(獨聖殿), 칠성각(七星閣), 나한전(羅漢殿)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에서 발견된 백초월스님의 독립운동 사료
2009년 5월 진관사 칠성각 보수작업 도중 오래된 태극기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6월에서 12월까지 발행된 '독립신문','신대한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등 십 수점의 항일신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태극기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제작하고 3.1만세 운동때 직접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해에서 창간한 '신대한신문' 제2호, 제3호와 그간 국내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자유신종보'등의 항일지하신문은 매우 가치가 높은 사료들로써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초월신사 진영
초월스님은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와 신문을 일경에 체포되기 전 급하게 숨겨놓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독립자금과 인재들은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면서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분입니다. 수차례 체포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가운데 1944년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1086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고, 2014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었습니다.
2009년 5월 진관사 칠성각 보수작업 도중 오래된 태극기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6월에서 12월까지 발행된 '독립신문','신대한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등 십 수점의 항일신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태극기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제작하고 3.1만세 운동때 직접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해에서 창간한 '신대한신문' 제2호, 제3호와 그간 국내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자유신종보'등의 항일지하신문은 매우 가치가 높은 사료들로써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초월신사 진영
초월스님은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와 신문을 일경에 체포되기 전 급하게 숨겨놓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독립자금과 인재들은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면서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분입니다. 수차례 체포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가운데 1944년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1086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고, 2014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었습니다.
진관사 태극기가 발견된 곳
진관사 칠성각
지난 2009년 5월 26일 독립운동 관계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오래된 태극기와 태극기에 싸인 20점의 독립신문류였다. 이 태극기는 3.1운동 당시 독립단체에서 사용한 태극기로 보여며,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기양식과 동일하다. 일장기 위에 태극의 음방과 4괘를 먹으로 그려넣은 유일한 태극기로 항일정신이 담겼다. 때문에 이 태극기는 당시 진관사에 주석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백초월스님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자 숨겨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진관사 칠성각
지난 2009년 5월 26일 독립운동 관계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오래된 태극기와 태극기에 싸인 20점의 독립신문류였다. 이 태극기는 3.1운동 당시 독립단체에서 사용한 태극기로 보여며,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기양식과 동일하다. 일장기 위에 태극의 음방과 4괘를 먹으로 그려넣은 유일한 태극기로 항일정신이 담겼다. 때문에 이 태극기는 당시 진관사에 주석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백초월스님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자 숨겨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진관사 태극기가 발견된 곳
진관사 칠성각
진관사 칠성각
칠성각(七星閣)
三角山 津寬寺(삼각산 진관사)
진관사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는 예부터 '서족은 진관사'라 하여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사찰이다. '고려사'와 '여암전서'등에 따르면 진관사는 신혈사의 후신으로, 1010년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 시절에 왕위 계승과정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관대사를 위해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1090년 고려 선종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푼 후부터 여러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가적 사찰이 되었다. 1397년 조선 태조는 진관사에 행차해 수륙사를 짓고 국행수륙재를 설행하게 하였고, 1442년 세종은 사가독서당을 진관사에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보내어 할글을 비밀리에 연구토록 하였다. 이후 진관사는 6.25전쟁으로 인해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1963년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최진관스님의 노력으로 옛 사격을 복원하였다. 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 불사 중 독립운동가 배초월 스님이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등이 발견되어 독립운동의 거점사찰이 확인되었고, 2013년에는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중요문화재 126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주지로 부임한 계호스님은 템플스테이체험관, 사찰음식체험관, 전통문화체험관을 건립하고 역사와 문화, 포교의 중심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종교와 인종을 넘어 모든 이들이게 행복을 전하는 '마음의 정원'을 지향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는 예부터 '서족은 진관사'라 하여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사찰이다. '고려사'와 '여암전서'등에 따르면 진관사는 신혈사의 후신으로, 1010년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 시절에 왕위 계승과정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관대사를 위해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1090년 고려 선종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푼 후부터 여러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가적 사찰이 되었다. 1397년 조선 태조는 진관사에 행차해 수륙사를 짓고 국행수륙재를 설행하게 하였고, 1442년 세종은 사가독서당을 진관사에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보내어 할글을 비밀리에 연구토록 하였다. 이후 진관사는 6.25전쟁으로 인해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1963년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최진관스님의 노력으로 옛 사격을 복원하였다. 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 불사 중 독립운동가 배초월 스님이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등이 발견되어 독립운동의 거점사찰이 확인되었고, 2013년에는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중요문화재 126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주지로 부임한 계호스님은 템플스테이체험관, 사찰음식체험관, 전통문화체험관을 건립하고 역사와 문화, 포교의 중심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종교와 인종을 넘어 모든 이들이게 행복을 전하는 '마음의 정원'을 지향하고 있다.
극락교 앞에도 안내판이 보인다.
백초월길. 백초월 스님과 진관사 태극기, 진관사 태극기 이야기
백초월길. 백초월 스님과 진관사 태극기, 진관사 태극기 이야기
백초월길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복원하던 중 오래된 태극기와 함께 독립신문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태극기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백초월스님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자 숨겨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정신과 역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진관사 진입구간에 '백초월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합니다.
▹백초월 스님과 진관사 태극기 - 진관사 태극기는 거센 독립운동의 불길과 함께 불에타고 색이 바랬으나 백초월 스님의 노력으로 형태가 잘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일장기 위에 태극의 음방과 4괘를 먹으로 그려 불굴의 항일정신을 담아낸 유일한 태극기, 독립의 염원이 담긴 진관사 태극기를 백초월길에서 만나보세요.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복원하던 중 오래된 태극기와 함께 독립신문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태극기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백초월스님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자 숨겨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정신과 역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진관사 진입구간에 '백초월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합니다.
▹백초월 스님과 진관사 태극기 - 진관사 태극기는 거센 독립운동의 불길과 함께 불에타고 색이 바랬으나 백초월 스님의 노력으로 형태가 잘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일장기 위에 태극의 음방과 4괘를 먹으로 그려 불굴의 항일정신을 담아낸 유일한 태극기, 독립의 염원이 담긴 진관사 태극기를 백초월길에서 만나보세요.
진관사 태극기 이야기
●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35년간의 치욕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 진관사 태극기는 항일정신을 담아 일장기에 먹으로 덧그려 만들어졌습니다.
● 거센 독립운동을 거치며 얼룩지고 불에 타기도 하여 고난을 겪었습니다.
● 이후 90여년을 어둠 속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 세상의 빛을 다시 만나 그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35년간의 치욕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 진관사 태극기는 항일정신을 담아 일장기에 먹으로 덧그려 만들어졌습니다.
● 거센 독립운동을 거치며 얼룩지고 불에 타기도 하여 고난을 겪었습니다.
● 이후 90여년을 어둠 속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 세상의 빛을 다시 만나 그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초월길
解脫門(해탈문)
津寬寺(진관사)
大雄殿(대웅전)
대웅전 우측에 있는 冥府殿(명부전). 그리고 그 옆에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적묵당이 배치되어 있었다.
적묵당(寂默堂)옆에는 많은 진관사 내 문화재 소개 안내판이 서 있었다.
진관사 칠성도와 석불좌상
칠성각에는 치성광후불도와 치성광석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0년(융희 4) 10월에 조성되었으므로 역사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칠성도는 옆으로 구성된 횡열식 구도이데, 그 중앙에 치성광불과 일광, 월광등 삼존불이 있고, 이 좌우로 앞줄에 칠월성군이 나란히 서 있다. 뒷줄에는 칠성을 부처님으로 변화시킨 칠불이 한 줄로 나란히 있는데, 이 가운데 한 분씩 바뀐 채 배치된 구도가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높고 뾰족한 불상의 육계와 긴 얼굴, 얼굴과 팔등의 금색, 성군들의 높은 보관과 보관의 금장식, 홍색위주의 가사와 도포 등과 같은 것을 화사하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칠성도 앞 정면세 치성광불로 모셔진 34cm의 작은 돌로 된 석불상이 모셔져 있다. 아기 같은 얼굴과 신체는 순진무구한 부처님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말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불로 그 가치가 크다.
칠성각에는 치성광후불도와 치성광석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0년(융희 4) 10월에 조성되었으므로 역사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칠성도는 옆으로 구성된 횡열식 구도이데, 그 중앙에 치성광불과 일광, 월광등 삼존불이 있고, 이 좌우로 앞줄에 칠월성군이 나란히 서 있다. 뒷줄에는 칠성을 부처님으로 변화시킨 칠불이 한 줄로 나란히 있는데, 이 가운데 한 분씩 바뀐 채 배치된 구도가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높고 뾰족한 불상의 육계와 긴 얼굴, 얼굴과 팔등의 금색, 성군들의 높은 보관과 보관의 금장식, 홍색위주의 가사와 도포 등과 같은 것을 화사하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칠성도 앞 정면세 치성광불로 모셔진 34cm의 작은 돌로 된 석불상이 모셔져 있다. 아기 같은 얼굴과 신체는 순진무구한 부처님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말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불로 그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