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신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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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 산11-1
탐방로그
애국지사 정제신의 묘을 찾기 위해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 16에 왔다. 광주에서 수원으로 가는 43번 국도 도로변이었는데, 광주시 오포읍 추자리와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의 경계라고 한다. 국도변에서 바로 묘소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탐방 당시 묘소 이장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의 휘 제신 자 준백이시니 광주정씨 시조 고려말 삼중대광 문하시중 찬성사 휘 臣扈(신호)의 20세손이시다. 공의 11대조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휘 응규, 9대조 조산대부 휘 광문, 고 휘 동현공의 차남이시다. 공은 서기 1883년 4월 23일에 출생하셨고 천성이 영매하시어 하나를 들으시고 열을 깨우치셨다 한다. 한학을 수학하셨으며 유업을 닦으시다 어느듯 세월은 흘러 청년기가 되자 왜적의 만행으로 근역 삼천리의 이 땅을 침략당하고 서기 1895년 을미사변에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강압적인 을사조약 체결로 그 후 서기 1909년에는 강
제로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을 당하고 일제 치하로 들어가자 항일사상이 전국적으로 일게 되여 공께서도 이에 호응하여 서기 1919년 기미 3 월1일에 계획된 3.1만세운동에 참여 관내 동지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선봉이 되여 오포면사무소의 소재지인 고산리에서부터 광주군청 소재지까지 횃불을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도중 삽시간에 천여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군중들이 군청 소재지까지 이르렀으나 왜경의 무차별한 총질로 강제해산을 당하였고 그 후 공께서는 오포면 관내의 주동자로 왜경에게 체포되시여 온갖 고문을 당하시고도 1년간의 체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시고 출감하시었다. 출옥하신 후에도 애국적인 항일정신은 변함이 없으시며 지하 비밀운동을 암약하시다가 왜경에게 발각 재체포되여 고문만을 당하시고 다행히 석방은 되시였으나 역시 왜경의 감시는 더욱 심하여 자유로운 행동은 물론 훈학조차 못하게 되여 생계마져 막연하게 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애석하게도 춘추 46의 젊은 연세로 서기 1928년 5월 31일(음 4월 13일)에 자결하신 애국자이시다. 국가에서는 늦게나마 공의 애국정신을 인지하고 서기 1992년 3월1일 국가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여 추서받으셨으며 배 전주이씨 사이에 1남 4녀를 두시였다. 공의 비석을 수년 전에 건수하였으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사실을 정석에 새겨 후손에게 길이 전하기 위하여 자 호림이 삼가 개수하나이다.
서기 1993년 월 일
종손 상엽 근찬
자 호림 근수
손 상빈 상붕, 증손 지원 지윤 재윤
광주정씨 선조 성묘 순례 기념
묘소 이장을 공고하는 안내판이다.
광주에서 수원으로 가는 43번 국도 도로변에서 애국지사 정제신의 묘을 찾았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 16이다.
국도변에서 바로 보이는 모습이다.
알림
독립유공자 정제신 선생 묘
광주 상수산 만석동

정제신(1883~1928) 선생은 일제 강점기하에서 이 고장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로서 자는 준백 본관은 광주이다.
선생은 조선 말기 고종 20년(1883) 4월 23일 광주군 오포면 추자리에서 동현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찌기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유업을 닦았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고 강압적인 식민지 무단정치를 감행하자 선생은 크게 울분을 느끼고 점차 항일 민족독립사상을 간직하게 되었다.
마침내 1919년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관내 동지 40여명이 모인 가운데 그 선봉적 역할을 다하였다. 선생이 이끄는 시위대는 오포면 사무소의 소재지인 고산리에서부터 광주군청 소재지까지 횃불을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도중에 시위 군중은 어느덧 1천여명으로 불어나 읍내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만세소리가 처지를 진동케 했으나 급파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강제해산 되었다. 그후 선생은 오포면 관내의 주동자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1년간의 체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선생의 애국적인 항일정신은 변함이 없어 지하비밀 민족운동을 계획 암약하다가 일경에게 발각 다시 체포되어 모진 악형을 받았다. 얼마 뒤 석방되었으나 선생에 대한 일경의 감시는 더욱 심해져 지유로운 행동은 물론 훈학조차 못하게 되어 생계마저 막연하게 되었다. 선생은 건강마저 악화된 가운데 일제에 대한 울분과 증오 끝에 마침내 1928년 5월 31일 자결하니 향년 46세였다. 국가에서는 뒤늦게나마 애국지사로서 활약했던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누구나 이곳을 경허하게 가꾸어 영원히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1993년 2월 일 광주군수
광주경철서장, 광주문화원장
유족 : 정호림
감수인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학박사 최홍규
愛國志士 光州鄭公 濟莘 之墓(애국지사 광주정공 제신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