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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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산5-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국광복군 참모장 이범석(1900.10.20 ~ 1972.5.11)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제2지대장으로서 미국군과 합동 작전에 참가했고, 1945년에는 광복군의 참모장(중장)이 되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1888.2.15 ~ 1957.1.15)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해 광복군 총사령이 되었으며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대리 황학수(1879.7.19 ~ 1953.3.12)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으며, 의용군을 모집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총사령관 대리로서 항일전을 지휘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장 조성환(1875.7.9 ~ 1948.10.7) 1935년 군무장, 1938년 군사특파단 단장 등을 맡으며 한국광복군 창설과 군사 통합에 앞장섰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중국의 진시 수도였던 충칭의 자링빈관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중국 정부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출범한 것이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집전례식 내빈 방명록
한국광복군 중국 내 지역별 주둔 배치도
경찰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내무부 아래 경찰 조직을 두었다. 충앙경찰기구로는 '경무국'과 '경무과'가 있었으며, 지방경찰기구로는 연통제와 연계된 '경무사', 교민단에 소속된 '의경대'가 있었다. 충칭시기에는 특수경찰기구로 '경위대'를 창설했다.
특무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자금 모집, 정보 수집, 의열투쟁 등과 같은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특무 조직과 요원들을 두었다. 특무조직으로는 지방선전부, 군사주비단, 의용단, 병인의용대, 한인애국단 등이, 특무요원으로는 지방선전 대원, 조사원, 특파원, 애국단원등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8년 이동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화이에서 수립되어 13년동안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14년(1932) 4월 윤봉길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났다. 첫 번째로 자리 잡은 곳은 항저우였는데,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자싱에서 생활했다. 임시정부는 17년(1935) 11월까지 항저우에서 머물다가 일본의 대대적인 추적을 피해 전장으로 이동한 뒤 난징을 중심으로 약 2년간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19년(1937)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작지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잠시 창사에 모여 활동하다가 20년(1938) 7월 광저우로 이동해 동산바이위안에 정식 청사를 마련했다. 중국 최남단에 위치해 일본의 공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고 국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광저우에서 약 25km 떨어진 포산으로 이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마저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100여명이나 되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이동 자금과 교통편을 마련하기가 쉽지않았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에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싸우이, 류저우 등을 거쳐 21년(1939) 5월 치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곳에 모인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모두 107명었다. 22년(1940) 9월에는 임시정부 요인 대부분이 수도인 충칭으로 이동해 27년(135( 환국할 때까지 활동했다.
정당 계보도
한국독립당. 대한민국 12년(1930) 1월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등 우익계열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창당한 정당이다. 그 뒤 일부 인사가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면서 와해될 뻔했으나, 17년(1935) 항저우에서 재건되었다. 그러다 22년(1940) 충징에서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과 통합해 한국독립당으로 발전했다.

조선혁명당. 대한민국 11년(1929) 9월 남만주 지역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의 결과로 창당되었다. 13년(1931) 9월 일본의 만주 침략 후 중국 관내(산해관의 남쪽) 지역으로 이동해 17년(1935) 조선민족형겸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2년 뒤 탈당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22년(1940) 통합 한국독립당이 재건되자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 대한민국 17년(1935) 7월 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의열단(김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혁명당(윤기섭, 신익희) 등이 연합해 창당했다.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의열단 안사들이 운동을 주도하자,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등의 계열이 이탈했다.

한국국민당. 대한민국 17년(1935) 11월 중국 항저우에서 김구, 송병조, 차리석 등 우익 계열 인사들이 좌익계열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에 대응하기 위해 창당했다. 한국국민당은 22년(1940) 우파 3당이 통합해 새로 한국독립당을 창립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운의 운영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수행했다.
1차 개헌 대한민국 원년(1919).9.11 '대한민국 임시헌법' 전문, 8장 58개조. 대통령제및 삼권분립 체제를 마련한 개헌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의 한성정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크의 대한국민회의와 통합을 이루면서 제정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이다. 제1차 개정 헌법은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으며, 임시의정원(입법부), 국무원(행정부), 법원(사법부)으로 이루어진 삼권분립체제를 따랐다.
2차 개헌 대한민국 7년(1925).4.7 '대한민국 임시헌볍' 6장 35개조 대통령체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도입한 개헌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추진된 제2차 헌법개정안이 실린 '독립신문'이사이다. 개정안은 3월 3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통과되어 4월 7일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제2차 개정 헌법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도입했으며 국무령의 임기를 3년으로 정했다.
3차 개헌 대한민국 9년(1927).4.11 '대한민국 임시약헌' 5장 50개조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도입한 개헌

국무위원들이 평등한 권한과 의무를 가지고 국정을 처리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한 제3차 개정헌법이다. 제2조에서 '광복운동자의 대동단결인 당 즉 민족유일당이 완성된 때에는 그 당시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가진다'라는 제제를 둠으로써 당시 국가를 운영한다는 이당치국(以黨治國)원칙을 천명했다.
4차 개헌 대한민국 22년(1940). 10.9
'대한민국 임시약헌' 5장 42개조. 단일지도체계인 주석제를 채택한 개헌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폐지하고,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를 채택한 제4차 개정헌법이다. 이에 따라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수반으로서 국군인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했다.
5차개헌 대한민국 26년(1944) 4.22
좌우의 연합정부로 출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한 개헌


좌익 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후 좌우 세력이 합의해 만들어낸 제5차 개정헌법이다. 좌익 진영의 몫으로 부주석제를 신설했는데,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당산되었다.
의회활동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조직과 활동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대한민국 원년(1919) 4월 25일 지금의 '국회법'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했다. 임시의정원은 이에 근거해 조직되고 운영되었다.
임시의정원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원과'들과 이들을 대표하는 '의장'과 '부의장'으로 구성되었다. 의원들은 각종 법률을 제정하고, 정부의 예산을 심의하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했다. 임시의정원은 이러한 의원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산하에 사무를 담당하는 '비서국'을 두었으며, 전원위원회, 상임위원회, 특별위원회와 같은 '위원회'도 설치해 운영했다.
역대 임시의정원 의장
제1,12,15대 이동녕, 제2대 손정도, 제3,17,20대 홍진, 제4대 김인전, 제5대 조소앙
제8대 조상섭, 제9대 여운형, 제10대 최창식, 제11,16,19대 송병조, 제13대 이강, 제14,18대 김봉준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부터 국호,연호,국기,국가 등 국가의 상징을 계승했다. 대한민국 30년(1848)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국호인 '대한민국'을 계승한 데 이어 관보에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적으며 임시정부 연호를 이어갔다. 현행 태극기와 애국가도 임시정부에서 이어온 것이다.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다양한 양식으로 그려지던 태극기를 24년(1942) '국기 양식 일치안'을 제정, 공포해 통일했고, 북미 대한민국 23년(1941)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國內外同胞(국내외동포)에게 告(고)함
친애하는 국내외 동포 자매형제여 파시스트 강도의 최후의 疊壁(첩벽)을 고수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9월 2일에 항서에 서명을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패망으로 인하여 擧世(거세)가 기뻐 뛰는 중에 있어서, 조국의 해방을 눈앞에 목도하면서 삼천만 한국민족이 欣喜雀躍(흔희작약)하는 중에 있어서, 본 정부가 근 30년간에 주야로 그리던 조국을 향하야 전진하려는 前夕(전석)에 있어서, 일즉이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야 본 정부를 애호하고 독려하던 절대다수의 동포와 또 이것을 위하여 본 정부와 유리전전하면서 공동 분투하던 동포의 앞에 본 정부의 포부를 告하려 할 때에 본 주석은 非常한 感奮(감분)을 금하지 못하는 바이다. 일국의 흥망과 일민족의 성쇠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운이 단절되는 데 있어 羞恥的因素(수치적인소)가 허다하였다하면 금일에 조국이 해방되는 데 있어 각고하고 장절한 노력이 있었을 것은 삼척의 동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허다한 우리 선열의 寶貴(보귀)한 열혈의 대가와 中, 美, 蘇, 英 등 동맹군의 英勇(영용)한 전공이 없었으면 어찌 조국의 해방이 있을 수 있었으랴. 그럼으로 우리가 조국의 독립을 눈앞에 전망하고 있는 이때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선열의 업적을 追想하여 滿腔의 경의를 올릴 것이며 盟軍의 위업을 선양하여 열렬한 사의를 표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현 계단은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계단이다. 다시 말하면 復國의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계단이다. 그러므로 現下 우리의 임무는 번다하고도 복잡하며 우리의 책임은 중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조국의 독립을 완성함에는 우리의 一言一句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다 영향을 주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매사를 임할 때에 먼저 확실하게 분석하여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명확한 판단 위에서 용기 있게 처리하여야 된다. 본 정부는 이때에 당면 정책을 如左히 제정 반포하였다. 이것으로써 현 계단에 처한 본 정부의 포부를 中外에 천명하고자 함이며 이것으로써 전진노선의 지침을 삼고자 함이다. 또한 이것으로써 동포 諸位의 당면노선의 지침까지 삼으려 하는 것이다.
친애하는 우리 동포 자매형제여 우리 조국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민주단결을 완성하며 국제간의 안전과 인류의 평화를 증진하기 위하여 본 정부의 당면정책을 실행하기에 공동노력하자!

임시정부당면정책
一. 본 임시정부는 最速(최속) 기간 내에 곧 입국할 것
二. 우리 민족의 해방 및 독립을 위하여 血戰한 中, 美, 蘇, 英 등 우방민족으로 더불어 절실히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에 의하여 세계일가의 안전 및 평화를 실현함에 협조할 것
三. 연합국 중에 주요국가인 중, 미, 소, 영, 법, 오강에 향하여 먼저 우호협정을 체결하고 외교 途經을 叧闢할 것
四. 盟軍 駐在期 내에 일체 필요한 事宜를 적극 협조할 것
五. 평화회의 및 각종국제집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應有한 발언권을 행사할 것
六. 국외임무의 결속과 국내임무의 전개가 서로 접속되매 필수한 과도조치를 집행하되 전국적 普選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외 각 계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집단, 각 지방대표와 著名 각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
七.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된 즉시에 본 정부의 임무는 완료된 것으로 認하고 본 정부의 일체 직능 및 소유물건은 과도정권에게 교환할 것
八. 국내에서 건립된 정식 정권은 반드시 獨立國家民主政府均等社會를 원칙으로 한 新憲章에 의하여 조직할 것
九. 국내에 과도정권이 성립되기 전에는 국내 일체 질서와 대외 일체 관계를 본 정부가 負責維持할 것
十. 교포의 안전 및 귀국과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구제를 신속처리할 것
十一. 敵의 일체 법령의 무효와 신법령의 유효를 선포하는 동시에 敵의 통치하에 발생된 일체 罰犯을 사면할 것
十二. 敵産을 몰수하고 敵僑를 처리하되 盟軍과 협상 진행할 것
十三. 적군에게 被迫出戰한 韓籍軍人을 국군으로 편입하되 盟軍과 협상 진행할 것
十四.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
대한민국27년 9월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
옥상정원이라고 되어있어 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산 5-5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새롭게 개관되어서 찾았다.
위치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공원 주차장 바로 옆이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도왜실기』로 보는 한인애국단
『도왜실기』는 이봉창,윤봉길 의거의 진상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 14년(1932년) 12월 한인애국단장 김구가 중국어로 펴낸 책이다. 환국한 이듬해인 대한민국 28년(1946) 3월 엄항섭은 이를 한글로 번역해 국내에 의열투쟁의 내용과 성과를 알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
대한민국 13년(1931) 9월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과의 공동 투쟁을 촉진하고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의열투쟁을 추진했다. 같은 해 11월 김구는 이를 펼쳐나갈 특무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대한민국 14년(1932) 1월 8일 일본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봉창 의거와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가 대표적인 거사였다. 이 밖에 같은 해 2월 12일 상하이 침공의 지휘본부인 일본 전함 폭파시도, 3월 3일 장완(江灣) 비행장 격납고 및 무기고 폭파 시도, 이덕주.유진식의 조선총독 처단 기도, 최흥식과 유상근의 관동군 사령관 처단 기도 등도 모두 한인애국단이 펼친 파상적인 특무공작이었다.
윤봉길의 의열투쟁
대한민국 14년(1932) 4월 29일 윤봉길은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침략자와 고위 관료들을 처단했다. 일본이 상하이를 침공한 뒤 승리했다고 전승축하식을 벌이고 있던 단상에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이 의거는 한중 양 국민의 항일의지를 드높이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정부와 중국인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프랑스 조계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세워졌다. 3.1운동을 동태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나, 이를 실행에 옮길 곳은 찾기 힘들었다. 국내에는 조선총독부가, 중국과 러시아에는 일본영사관이 설치되어 있으 활동하는 것이 쉽지않았다. 그런데 프랑스는 자유,평등,박애 등 혁명정신을 중시하여 자신의 조계에서 펼쳐지는 독립운동에 오후적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 4월 수립할 때부터 14년(1932) 4월까지 13년 동안 프랑스 조계에 청사를 두고 활동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감시와 수색,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여러 차례 청사를 옮겨야 했는데, 임시정부 청사로 알려진 곳은 모두 12곳이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샤레이로 2층 양옥집
대한민국 원년(1919) 8월 상하야 프랑스 조계 샤페이로에 자리한 2층 붉은 양옥집에 태극기가 내걸렸다. 수립 직후 제대로 된 청사 건물이 없어 불편을 겪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안창호가 미주에서 모금해 온 자금을 이곳에 청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정부 임무를 수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부로서 활동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광복의 그날까지 한민족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행정적으로는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해 나라 밖에서 국내 행정을 조정하고, 국외 동포사회를 통솔하기 위해 거류민단제 등을 시행했다. 군사적으로는 만주지역 독립군과 손잡고 독립전쟁을 펼쳤고, 대한민국 22년(1940)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외교적으로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힘쓴 결과 대한민국 25년(1943)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암울했던 항일투쟁기,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에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독립에 대한 희망을 이어갈 수 있게 했다.
군사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개병제에 따라 국내외 동포들로 군대를 편성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원년(1919)에 육군무관학교를 세우고, 이듬해인 1월에는 대한적십자회의 주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부섥관으로 열어 독립전쟁에 필요한 남녀 간호병을 길러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공준 창설을 꿈구며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 윌로스에 한인비행사양성솔를 설립했다. 대한민국 16년(1934)에는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 독립군 간부를 육성했다. 중일전쟁 이후 군사위원회와 군사특파단을 조직하며 군대 창설을 본격화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충칭에서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펼치며 자주 독립을 이루가 위해 끝까지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