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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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명문
오늘은 우리 민간신문의 시조인 "독립신문" 창간 아흔네돌이요 또 "신문의 날" 서른세돌이다. 이 뜻깊은 날에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 그리고 한국?문편집인협회와 한국기자협회, ??언론인협회등의 우리 언론인들이 한결같은 뜻을 모아 드디어 언론인의 숙원인 송재 서재필선생 동상건립을 실현하였으니 기쁘지 그지없다.
돌이켜 보면, 선생이 활동하던 ?? 의 국내정세는 쇄국의 기운이 아직 ??채, 열강침략의 각축장이 되는 동시에 동학혁명과 개화파 세력의 성장 및 ????로 수구파의 세력이 ??? 개화하는 형국이었다. 선생은 개화파의 가장 젊은 ??? 일꾼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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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는 애국적인 헌금을 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회원이 될 수 있었으며 운영 규칙도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선되어갔다. 이에 따라 초기에 참여했던 관리들은 물러나고 개화한 선각자들이 민중계몽에 앞장서 매주 일요일마다 토론회를 개최한 결과 대중적인 터전이 점차 굳어져 갔다.
때마침 우리나라는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으로 한동안 일본의 독수로부터 벗어나긴 했지만 러사아의 침략간섭은 물론 열강의 극성스런 이권 쟁탈로 새로운 위기에 부딧쳤다. 러사이는 군사기지를 설치하려고 부산 절영도의 조차를 요구하고 자국 군대를 서울에 상주시키는 동시에 러시아장교들로 하여금 우리군대의 훈련을 맡게 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침략야욕에 반대하녀 선생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구국선언상소"를 올렸으며, 1898년 3월에는 내정개혁및 러시아의 재정고문과 군사고문 해직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에서 최초로 "만민공동회"라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선생은 "독립신문"의 주필과 "독립협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와 같이 조국의 자주독립과 자유민권운동에 헌신하다가 1898년 5월에 수구파의 박해와 열강의 미움을 사서 또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19년 3월 조국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넌 선생은 필라델피아에서 "한인회의"를 개최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힘과 있는 재산을 다바쳐가며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후 1947년에 미군정 장관 하지중장의 초청으로 선생은 미군정 최고 고문과 과도정부 특별의정관 자격으로 50년만에 다시 조국을 찾았다. 선생은 1년여동안 조국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쓰다가,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직후에 조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갔다. 얼마있지않아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가슴아파하다가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교외에서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주개화운동에 힘쓴 위대한 선각자이여 우리 만간신문의 시조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선생의 공적을 간추려 명문을 대신닿낙ㄷ.
1990년 4월 7일
독립문
독립문(獨立門)
독립문은 갑오개혁(1894-1896)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 석조물이다. 갑오개혁은 내정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이 문은 원래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7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 공사 때문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하고 한국인 기사 심의석(沈宜碩)이 시공하였다. 화강석으로 쌓은 이 문은 높이가 14.28m, 너비 11.48m로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다. 내부 왼쪽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상부에는 돌난간이 둘리어 있다. 이맛돌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 무늬를 새겼다. 문의 정면과 뒷면에 있는 현판석에는 좌우에 태극기를 새기고,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獨立門'을 새겼다.
영은문 주초
이 부재는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다.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1407년(태종 7)에 서대문 밖 지금 위치에 모화루(慕華樓)를 짓고, 1430년(세종 12)에는 모화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홍살문을 세웠다. 이후 1536년(중종 31)에 격이 낮은 홍살문을 없애고 청기와를 덮은 영조문을 만들었으며 3년 뒤 이름을 영은문이라 고쳤다. 철거되기 전 영은문의 사진을 보면, 현재의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다포로 공포를 짜 올린 뒤 우진각 지붕을 덮은 모습이였다.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필은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의견에 따라 1896년(건양 1)에 모화관을 수리하여 독립관으로 하고, 영은문을 없앤 터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앞쪽에 있던 초석은 1934년 약간 남쪽으로 옮겼다가 1979년 성산대로를 만들면서 독립문과 함께 지금 위치에 옮겨졌다.
독립문
송재 서재필 선생 상
송재 서재필 선생 상 / Songjae Suhr Jae-Phil's Statue
관리번호 10-1-21 / 건립자 : 송재서재필선생동상건립추진위원회 / 관리자 : 서대문독립공원 관리사무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 선생은 개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윤치호.이상재 등의 협력을 얻어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여 종래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獨立門)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또한 토론회(討論會)를 통해 시민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과 개혁에 대한 토론을 시키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조직하여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 요구를 반대하는 등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의 경비에 바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나 1951년 1월 5일 미국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1994년 미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