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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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3가 41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죽지 않는 혼
죽지않는 혼
아아!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
대체로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살 수 있는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용서를 비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死而不死) 저 깊은 땅속에서 여러분을
반드시 도울 것이니 우리 동포 형제들은 천만번 분발하고 힘써서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여
힘을 합쳐 우리의 자유(自由)와 독립(獨立)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도
마땅히 어두운 지하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아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노라.
1905년 11월 3일 새벽
- 소설 ≪죽지않는 혼≫(민명기 2018) 참조 -
이 글은 민영환 선생의 유서이다.

嗚呼(오호라).
國恥民辱(국치민욕)이 乃至於此(내지어차)하니 我人民(아인민)은 將且殄滅於生存競爭之中矣(장차진멸어생존경쟁지중의)리라.
夫要生者(부요생자)는 必死(필사)하고 期死者(기사자)는 得生(득생)이니, 諸公(제공)은 豈不諒只(기부랑지)아.
泳煥(영환)은 徒以一死(도이일사)로 仰報皇恩(앙보황은)하고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이사아이천만동포형제)하노라.
嗚呼(오호) 勿小失望(물소실망) 訣告我(결고아) 大韓帝國二千萬同胞(대한제국이천만동포)
슬프다 국가와 민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속에서 다 죽게 되었고나 대개 구차히 살고저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주기를 각오한자는 도리어 살아날 길이 있는 것이니 동포 여러분은 어찌 이를 모르리오 영환은 한갓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를 갚고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은것이 아니라 기필코 여러분을 지하에서 도울지니 바라건대 동포 형제 아무쪼록 더욱 분투
노력하여 뜻과 기운을 굳게 가지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나도 지하에서 기뻐하겠노라. 동포여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노라.
충정공의 동상 앞에 있는 것들은 지하철의 공조장치를 이쁘게 돌로 둘러싼 것이었다.
혈죽가(血竹歌)
사동우 대구여사(寺洞禹 大邱女史)

협실에 솟은 대는 충정공 혈죽이라.
비와 이슬 떨쳐 버리고 방 안의 푸른 뜻은
지금의 위국 충정을 진작하네.
충정의 굳은 절개 피를 맺어 대가 돋아
누상에 홀로 솟아 만민을 놀라게 하니
인생이 비어 잡초가 우거져도 혼자 푸르러
충정공의 곧은 절개는 포은 선생보다 위로구나
석교에 솟은 대도 선죽이라 하거늘
하물며 방 안의 대는 일러 무엇하리,
- ≪대한매일신보≫ 광무 10년(1906) 7월 21일 -
민영환이 스승 정술교에게 보낸 서한
(일제의 내정간섭에 반대한다는 내용)
<충정공 민영환 생애와 동상 이전>
<충정공 민영환 생애와 동상 이전>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로서 최초로 세계 주요 국가들을 일주하고 다양한 문물과 문명을 들여와 국정쇄신과 주권수호에 온 힘을 다했던 선각자이다. 선생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동부승지, 대사성,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사, 군부대신, 탁지부대신등을 지내며 개혁과 자주독립의 길에 앞장섰다. 또한 1806년 특명전권대사로 러시아 리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고 1897년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 사절로 두번째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선생은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은 <<천일책>>을 저술했고, 특히 문은 혈기와 같고 무는 몸과 같으니 몸이 없으면 혈기를 보호할 수 없다면서 국방 개혁을 강조했다. 또 세계 각국과 교류하며 그들의 전략적으로 활용하는저극적인 외교가 필요하다며 다만 일본과 교류는 하되 합치지는 말고, 러사아를 사귀되 섬기지는 말라고 하면서 청국에 사대하던 일은 버리고 선린 우호 관계를 유지할것을 건의했다. 선생은 또한 공화제 사상을 계몽하고 의회제 설립을 주도했던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했으며 만민공동회가 해산된 후에는 고종황제의 위상을 강하하는 데 힘썼다. 독립협회 인사들과 계속 교류하먀 자자독립의 길을 찾았고 1902년에는 이준, 이상재, 박은식, 이동희, 양기탁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여 러일전쟁이 일어났을때 엄정중림을 선언하고 때를 보아 친일내각을 타도하고자 했다. 명성황후 사후에는 고종황제를 보필하며 고종황제를 보필하며 조선은행창립, 대한제국 국가제정. 화와이이민, 장충단 건립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선생은 조병세 등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과 늑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동지들과 대궐 앞에서 시위를 결행했다. 그러나 그 뜻을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직자로서 국가 수호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뼈저리게 느껴 30일 새벽에 자진 순국(自盡殉國)하였다. 이상설은 "민영환이 죽은 오늘이 바로 전국민이 죽는 날"이라고 애도했고, 전국각지 유생들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고종황제는 그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에 죽첨정(竹添町)이라 불렸던 이곳은, 1946년 선생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층정로로 바꾸었고, 마침내 오늘 이 자리에 선생의 동상을 다시 세우게 되었으니 이를 계기로 선생이 남긴 애국 충정과 개혁의지. 그리고 책임의식이 후대에 본보기로 길이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된 민영환의 혈죽

민영환의 피묻은 옷과 칼은 민영환 집 뒷방에 봉안되었다. 방문을 잠가둔 지 7개월이 지난 1906년 7월 어느날 가족이 문을 열어보니 4줄기, 9가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마루바닥 틈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이 사실이 대한매일신보 7월 17일자에 보도되면서 경향 각지에서 인파가 밀려들었다.
이후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혈죽(血竹)’으로 명명되었고, 민영환의 자택에는 혈죽을 구경하고 그의 넋을 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문인 학도들도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민영환의 충절을 되새겼다. 박은식도 ‘혈죽기편’을 지어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민영환의 가족은 혈죽을 광목천에 싸서 다락방에 몰래 보관하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민영환의 유서
충정공의 동상은 2호선 혹은 5호선 충정로역을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414 충정로사거리 교통섬 애국지사 민영환 선생 동상을 찾았다.
桂庭 閔忠正公泳煥之像(계정 민충정공 영환지상)

아아!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
대체로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살 수 있는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용서를 비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死而不死) 저 깊은 땅속에서 여러분을
반드시 도울 것이니 우리 동포 형제들은 천만번 분발하고 힘써서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여
힘을 합쳐 우리의 자유(自由)와 독립(獨立)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도
마땅히 어두운 지하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아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노라.
1905년 11월 3일 새벽
- 소설 ≪죽지않는 혼≫(민명기 2018) 참조 -
桂庭 閔忠正公泳煥之像(계정 민충정공 영환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