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77-4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大韓每日申報 社長 大英國人 裵說 之墓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배설 지묘)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배설 지묘)
[A-2] 베델(Bethell, Ernest T. 裵設 1872~1909)
베델은 영국 출신의 언론인이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데일리크로니클〉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그는 한국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를 창간하였는데, 이 신문들은 억눌린 한국 사람들의 대변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냈을 때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였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장지연이 사설로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싣자,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에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는 글을 싣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 독립투사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기사로 실어 일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일제의 미움을 받은 베델은 재판에 회부되어 6개월의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을 받고, 상하이로 끌려가 3주간 금고형을 살았다. 이후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심신이 쇠약해져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숨져 양회진에 묻혔다. 그는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10년 장지연이 추모의 글을 쓴 비석이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과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다. 1964년에 언론인들이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비석을 다시 세웠다.
베델은 영국 출신의 언론인이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데일리크로니클〉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그는 한국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를 창간하였는데, 이 신문들은 억눌린 한국 사람들의 대변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냈을 때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였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장지연이 사설로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싣자,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에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는 글을 싣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 독립투사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기사로 실어 일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일제의 미움을 받은 베델은 재판에 회부되어 6개월의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을 받고, 상하이로 끌려가 3주간 금고형을 살았다. 이후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심신이 쇠약해져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숨져 양회진에 묻혔다. 그는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10년 장지연이 추모의 글을 쓴 비석이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과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다. 1964년에 언론인들이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비석을 다시 세웠다.
大韓每日申報 社長 大英國人 裵說 之墓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배설 지묘)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배설 지묘)
裵說 墓碑文(배설 묘비문)
「어네스트.티.베셀」(裵設) 선생은 1872년 영국에서 나시어 1904년 일로전쟁에 신문특파원으로 처음 한국에 오셨다.
그해 7월 양기택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설하고 그 사장이 되시어 일본의 침략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한국민의 의기를 돋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이셨다. 일본의 압력은 날로 더하여 선생은 여러번 재판을 받고 옥고까지 겪으시다가 마침내 1908년 6월 신문사에서 물러나시게 되었다.
인하여 병을 얻어 1909년 5월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이때 나이 서른일곱이시었다. 유언에 이르기를 「나는 죽되 대한매일신보는 길이 살아 한국동포를 구하기를 원하노라」하였다.
선생 묘비의 비문은 1910년 장지연 선생이 지으신 것이나 뒤에 일본관헌이 깎아없앴다. 1864년 한국의 전언론인이 성금을 모아 그 원 비문을 알아보도록 하는 동시에 여기 간단히 그 사적을 적어둔다.
그해 7월 양기택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설하고 그 사장이 되시어 일본의 침략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한국민의 의기를 돋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이셨다. 일본의 압력은 날로 더하여 선생은 여러번 재판을 받고 옥고까지 겪으시다가 마침내 1908년 6월 신문사에서 물러나시게 되었다.
인하여 병을 얻어 1909년 5월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이때 나이 서른일곱이시었다. 유언에 이르기를 「나는 죽되 대한매일신보는 길이 살아 한국동포를 구하기를 원하노라」하였다.
선생 묘비의 비문은 1910년 장지연 선생이 지으신 것이나 뒤에 일본관헌이 깎아없앴다. 1864년 한국의 전언론인이 성금을 모아 그 원 비문을 알아보도록 하는 동시에 여기 간단히 그 사적을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