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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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5
탐방로그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1-5 경희대학교 중앙도서관 옆 고항문화공원 애국지사 주요섭 문학비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음력으로 보름께 나 되어서 달이 낮 같이 밝은데 은빛 같은 흰 달빛이 방안 절반 가득히 차있었읍니다. 나는 그 흰옷을 입은 어머니가 풍금 앞에 앉아서 고요히 풍금을 타는 것을 보았읍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옷들을 하나씩 하나씩 쓸어보고는 장롱에 넣었읍니다. 그 옷을 다 넣은때 장롱문을 닫고 쇠를 채우고 나를 안고 자리로 돌아왔읍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가만히 서 계십니다 사르르 바람이 와서 어머니 모시 치맛자락을 산들산들 흔들어 주었읍니다. 그렇게 산위에 가만히 서있는 어머니는 다른때 보다도 더 한층 이쁘게 보였읍니다.
단편 「사랑 손님과 어머니」 중에서
여심 주요섭 짓고, 일중 김충현 쓰다. 1984년 4월 29일 세우다.
여심 주요섭 선생은 1902년 11월 24일 평양서 문밖의 신양리에서 주공삼목사님의 둘째 아들로(형은 주요한 시인) 태어나 1972년 11월 14일 이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일찌기 숭실중학 일본청산학원 대학을 수업하시고 중국 상해 호강대학 및 미국 스탠퍼드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셨다. 선생은 192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신 후 50년간 단편 40여 편과 장편 10여 편을 남기셨다. 선생의 작품 세계는 초기의 저항의식과 중기의 휴머니즘 사상과 후기의 현실 고발 사상을 잘 그려낸 특출한 작가이셨다. 또한 선생은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으로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루신 적도 있으시며 직선적이고 진실한 대학자이셨다. 선생은 여류 수필가 김자혜 여사와 결혼하시어 큰아들 북명, 둘째아들 동명과 딸 승희를 두셨고 그간 단편집 「북소리 둥둥」등 다수의 창작집을 가지셨다. 오늘 선생이 타계하신 지 12주기를 맞이하여 제자 후학 문인들이 정성으로 경기도 파주군 금촌 기독교 공원묘지에 선생의 문학비를 세우다.
1984년 4월 29일
여심 주요섭 선생 문학비 건립위원회
위원장 : 백철 / 부회장 : 전숙희, 조경희, 서정범 / 간사 : 유승규, 최진우, 진용우 / 문하생 김해성 짓고, 서강 정덕채 쓰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1-5 경희대학교 중앙도서관 옆 고항문화공원 애국지사 주요섭 문학비를 찾았다.
오랜만에 모교를 찾았는데 대운동장에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고항문화동산이라고 했는데 경희평화민주동산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경희평화민주동산
이곳은 경희학원의 교훈인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를 실천하고 나아가 조국의 민주주의와 평화적 통일을 위해 젊음을 바친 경희대학교 동문들의 정신과 넋을 기리는 곳입니다.

2015.11.7
경희대학교.경희총민주동문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인 주요섭 선생은 독립유공자이시기도 하다. 묘소가 파주시 금촌동 금촌기독교묘역에 있었고
그 앞에 있던 주요섭 문학비는 묘소가 대전현충원 이장하면서 과거 근무하시던 이곳 경희대로 이전되었다.
여심 주요섭 문학비

음력으로 보름께 나 되어서 달이 낮 같이 밝은데 은빛 같은 흰 달빛이 방안 절반 가득히 차있었읍니다. 나는 그 흰옷을 입은 어머니가 풍금 앞에 앉아서 고요히 풍금을 타는 것을 보았읍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옷들을 하나씩 하나씩 쓸어보고는 장롱에 넣었읍니다. 그 옷을 다 넣은때 장롱문을 닫고 쇠를 채우고 나를 안고 자리로 돌아왔읍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가만히 서 계십니다 사르르 바람이 와서 어머니 모시 치맛자락을 산들산들 흔들어 주었읍니다. 그렇게 산위에 가만히 서있는 어머니는 다른때 보다도 더 한층 이쁘게 보였읍니다.
단편 「사랑 손님과 어머니」 중에서
여심 주요섭 짓고, 일중 김충현 쓰다. 1984년 4월 29일 세우다.

여심 주요섭 선생은 1902년 11월 24일 평양서 문밖의 신양리에서 주공삼목사님의 둘째 아들로(형은 주요한 시인) 태어나 1972년 11월 14일 이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일찌기 숭실중학 일본청산학원 대학을 수업하시고 중국 상해 호강대학 및 미국 스탠퍼드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셨다. 선생은 192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신 후 50년간 단편 40여 편과 장편 10여 편을 남기셨다. 선생의 작품 세계는 초기의 저항의식과 중기의 휴머니즘 사상과 후기의 현실 고발 사상을 잘 그려낸 특출한 작가이셨다. 또한 선생은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으로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루신 적도 있으시며 직선적이고 진실한 대학자이셨다. 선생은 여류 수필가 김자혜 여사와 결혼하시어 큰아들 북명, 둘째아들 동명과 딸 승희를 두셨고 그간 단편집 「북소리 둥둥」등 다수의 창작집을 가지셨다. 오늘 선생이 타계하신 지 12주기를 맞이하여 제자 후학 문인들이 정성으로 경기도 파주군 금촌 기독교 공원묘지에 선생의 문학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