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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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1-1576
탐방로그
주시경 선생 묘는 원래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었으나 1981년 서울 현충원으로 이장되었으며, 주시경 선생 묘비(묘 석물)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세종대왕기념관 앞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4293. 10. 1
서울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및
교직원 학생 일동 바치고
고 주시경 선생 이장 위원회 세우다.
4209.11.7.
황해도 봉산군에 나서
4247.7.27.
서울 내수동에서 죽다.
4293.10.1.
서대문 밖 고택골서 이곳에 옮겨 모시다.
아들: 삼산 백산 왕산
딸: 송산 춘산
손자: 영철 영일 영석
손녀: 영진 영옥 영애 소영
외손: 이완영 고관주
외손녀: 이옥희 이옥련 고경애
이곳 홍릉은 세종대왕의 릉이 있었던 곳이다.
구 영릉(英陵) 석물 / Stone Objects of Yeongneung / 旧英陵石雕 旧英陵石造物
지정번호: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2호 / 시대: 문종 2년(1452) /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번지 157호
영동은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헌왕후를 모신 왕릉으로 처음에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쪽 산등성이인 양주 대모산(강남구 내곡동)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논의가 일어나서 예종 원년(1469)에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겨 갔다. 이때 능을 치장했던 식물은 운반하기 어려워 가져가지 않고 현지 주변 땅에 묻었는데 1970년대에 발굴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남아 있는 구 영통 석물은 석양, 석마, 망주석, 장명등, 석인상, 난간주석, 혼유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인데 1974년에 이곳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 옮겨 왔다. 품목과 수량이 당초와 다르고 일부 부재는 행방을 모른다. 가장 상태가 좋은 편인 석호는 여주 영릉과 단국대학교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조선 전기 명필로 이름난 안평대군이 쓴 신도비는 새긴 솜씨가 아주 정교하나 풍화가 심하여 글자는 판독하기 어렵다. 구 영릉석물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와 석물 배치 방식, 그리고 제작 기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남양주시에 있었던 주시경 선생의 묘소가 햔충원으로 이장된 후 옛 묘비를 이곳에 보관하고 있다.
주시경 스승 묘비
주시경 스승 묘비
스승은 서기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태어나시어 19세 때인 189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이로부터 20년 동안 우리 말글 연구와 교육 및 한글 운동을 하시다가 39세 되던 해인 1914년 7월 27일 작고하시어 유해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현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 그 뒤 한글학회가 1959년 10월 7일 「고 주시경 선생 이장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 스승의 묘소 이장과 묘비 건립을 서둘러 이전할 산지와 묘소가 마련되고 묘비(비문은 최현배님 짓고 글씨는 정인승님 씀)가 제작되어 「주시경 스승 이장식」과 「묘비제막식」을 1960년 10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과 유족들 참배리에 거행하였다. 스승의 묘소는 그 뒤 1981년 12월 12일 국립묘지(현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65번지) 국가 제2유공자 묘역으로 다시 옮겨 모실 때 묘비를 비롯한 석물은 옮기지 않고 그 옛 무덤 터에 그대로 세워두었다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한글학회가 2008년 7월 31일 이곳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한흰샘은 크고 하얀샘이라는 뜻의 주시경 선생의 한글이름이다.
한힌샘 상주 주시경 스승의 무덤
한힌샘 상주 주시경 스승의 무덤

스승은 서기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태어나시어 19세 때인 189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이로부터 20년 동안 우리 말글 연구와 교육 및 한글 운동을 하시다가 39세 되던 해인 1914년 7월 27일 작고하시어 유해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현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 그 뒤 한글학회가 1959년 10월 7일 「고 주시경 선생 이장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 스승의 묘소 이장과 묘비 건립을 서둘러 이전할 산지와 묘소가 마련되고 묘비(비문은 최현배님 짓고 글씨는 정인승님 씀)가 제작되어 「주시경 스승 이장식」과 「묘비제막식」을 1960년 10월 1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과 유족들 참배리에 거행하였다. 스승의 묘소는 그 뒤 1981년 12월 12일 국립묘지(현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65번지) 국가 제2유공자 묘역으로 다시 옮겨 모실 때 묘비를 비롯한 석물은 옮기지 않고 그 옛 무덤 터에 그대로 세워두었다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한글학회가 2008년 7월 31일 이곳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한흰샘은 크고 하얀샘이라는 뜻의 주시경 선생의 한글이름이다.
스승은 열 아홉 살 때 갑오경장의 해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 들어 신학문을 닦고 한문과 영어의 공부에서 우리 말글의 훌륭한 가치를 깨닫고 이의 연구에 착수하니 이것이 실로 배달의 말글이 과학스럽고 진리 탐구의 괭이를 보기 처음이었다. 이로부터 스무 해 동안 혹은 정치 운동에 혹은 사회 개량 운동에 혹은 순한글 신문내기에 마침내는 망국민의 생활까지 갖은 풍상과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 말글 연구에는 잠시의 숨도 없이 그 밝혀낸 학리를 베풀어 말본과 말모이를 지으며 서울 안 모든 중등학교와 일요 강습소까지 혼자 도맡아 가르치기에 편할 날이 없이 성근을 다하다가 드디어 서른 아홉 살 장년으로써 아깝게도 이승을 하직하였다. 스승은 실로 배달 말글의 과학스런 연구의 개척자이요 국어 교육 한글 운동의 선구자이었다. 우리들이 국어 존중, 한글 사랑의 겨레 정신으로써 왜정의 압박에 항거하고 해방을 맞아서는 국어 교육, 한글 운동의 줄기찬 발전을 이룬 것은 다 직접 간접으로 스승의 기친 교화의 소치이다.
아아 갸륵하다. 스승은 겨레 정신의 영원한 거울이요 한글 문화의 불멸의 봉화이다. 4293년 10월 1일 제자 최현배 짓고 후학 정인승 쓰다.
스승은 열 아홉 살 때 갑오경장의 해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 들어 신학문을 닦고 한문과 영어의 공부에서 우리 말글의 훌륭한 가치를 깨닫고 이의 연구에 착수하니 이것이 실로 배달의 말글이 과학스럽고 진리 탐구의 괭이를 보기 처음이었다. 이로부터 스무 해 동안 혹은 정치 운동에 혹은 사회 개량 운동에 혹은 순한글 신문내기에 마침내는 망국민의 생활까지 갖은 풍상과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 말글 연구에는 잠시의 숨도 없이 그 밝혀낸 학리를 베풀어 말본과 말모이를 지으며 서울 안 모든 중등학교와 일요 강습소까지 혼자 도맡아 가르치기에 편할 날이 없이 성근을 다하다가 드디어 서른 아홉 살 장년으로써 아깝게도 이승을 하직하였다. 스승은 실로 배달 말글의 과학스런 연구의 개척자이요 국어 교육 한글 운동의 선구자이었다. 우리들이 국어 존중, 한글 사랑의 겨레 정신으로써 왜정의 압박에 항거하고 해방을 맞아서는 국어 교육, 한글 운동의 줄기찬 발전을 이룬 것은 다 직접 간접으로 스승의 기친 교화의 소치이다.
아아 갸륵하다. 스승은 겨레 정신의 영원한 거울이요 한글 문화의 불멸의 봉화이다. 4293년 10월 1일 제자 최현배 짓고 후학 정인승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