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리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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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산279(442-3)
탐방로그
도봉구 쌍문동 산 279(442-3) 효문중고등학교 뒤 쌍문공원 여성운동가 차미리사의 묘, 송덕비를 찾아가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입구에 있는 안내판과 같은 것이었다.
財團法人 德成學園 設立者 延安車氏 美理士 女史 之墓
재단법인 덕성학원 설립자 연안차씨 미리사 여사 지묘

본관은 연안이며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결혼한 후 2년만에 사별하였고, 21세에 상동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은 후, 22세에 상동청년회 부설 공옥초등학교에서 조선 언문을 교육함으로써 생애 최초의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23세에 되던 1901년 중국 소주의 중서여숙에 유학하여 약4년간 신학을 공부하였다. 190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교육을 통한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민족주의 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하였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한인 사회의 첫 여성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1907년 29세에 대동교육회를 확대개편한 대동보국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이듬해까지 기관지 대동공보를 발간하는 일을 하였다. 1910년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있던 스캐리트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였으며, 1912년 졸업하였다. 졸업후 조선 청년여성 교육을 위해 귀국하여 배화학당 사감 겸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9년 41세에 종다리교회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하여 여성교육기관으로써 여성야학인 조선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함으로써 여성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조선 최초 전국여자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84일간, 67개 지역 만 여 리를 순회하면서 문화보급, 여자해방, 문화선전등을 강연하였다. 이는 토착여성교육운동의 효시로서 그 의미가 크다. 1923년 부인야학강습소의 명칭을 근화학원이라고 바꾸었으며, 1925년 근화여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야학, 강습소, 학원등으로 불리웠던 비정규 교육기관에서 정규교육기관으로 승격한 것이다. 근화여학교는 차미리사선생이 전국 순회 강연을 통해 모은 기부금으로 설립한 순수 민족자본학교로서 의미가 있다. 1927년 근우회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29년 조선어 사전 편찬사업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1934년 여성들의 직업교육을 위해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고 법인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근화'라는 이름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0년 62세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1948년에는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촉구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서'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인 1950년 여성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하며 덕성여자초급대학(지금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천주교로 개종한 후 1955년 6월 1일 77세로 선종하여 우이동에 안장되었으며, 2002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車美理士 先生 頌德碑(차미리사 선생 송덕비)
한말의 풍운이 날로 위급하게 되자 선생은 비장한 뜻을 품고 미주로 건너 가시었다. 이역만리 여성의 몸으로서 국운의 만회를 위하여 주소 활약하시었는데 한편으로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뜻을 같이하시어 신한민보를 발간하시었다. 기미년 3.1운동에 즈음하여는 국내외의 긴밀한 연락을 맡으시고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하시었으며 1921년 10월 10일 근화여학교를 창설하시니 이것이 곧 덕성학원의 터전이 된 것이다. 이는 선생께서 지니신 바 3.1정신를 배양하고 민족독립의 길을 마련함에는 후배들을 교육함만 같음이 없다고 보신 그 숭고한 사상의 소치이었다. 그 뒤 선생께서는 오로지 여성교육에 헌신하시었으니 도리켜 보건대 좌와행주 나라와 겨레의 융성을 염원하시었으며 독신으로 평생을 자유와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굽힘이 없으셨으며 국운의 위난에서는 우국의 지사이시었으며 민족위난에서는 여성의 지도자이며 여성교육의 선각자이시었다. 선생은 1955년 6월 1일 향년 77세로 서거하시니 실로 선생을 숭앙하는 우리의 심정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바이며 그 유훈은 길이 후배들에게 이어질 것이다. 여기 선생의 공덕을 추모하여 거룩하신 생애를 돌에 쪼아 새기노니 영겁에 전하여질 것을 바라노라.
1966년 10월 10일 / 학교법인 덕성학원 이사장 박준섭 / 덕성여자대학교장 겸 덕성여자중고등학교장 송금선 / 김충현 서
도봉구 쌍문동 산 279(442-3) 효문중고등학교 뒤 쌍문공원 여성운동가 차미리사의 묘, 송덕비를 찾아가고 있다.
본관은 연안이며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결혼한 후 2년만에 사별하였고, 21세에 상동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은 후, 22세에 상동청년회 부설 공옥초등학교에서 조선 언문을 교육함으로써 생애 최초의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23세에 되던 1901년 중국 소주의 중서여숙에 유학하여 약4년간 신학을 공부하였다. 190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교육을 통한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민족주의 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하였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한인 사회의 첫 여성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1907년 29세에 대동교육회를 확대개편한 대동보국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이듬해까지 기관지 대동공보를 발간하는 일을 하였다. 1910년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있던 스캐리트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였으며, 1912년 졸업하였다. 졸업후 조선 청년여성 교육을 위해 귀국하여 배화학당 사감 겸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9년 41세에 종다리교회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하여 여성교육기관으로써 여성야학인 조선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함으로써 여성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조선 최초 전국여자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84일간, 67개 지역 만 여 리를 순회하면서 문화보급, 여자해방, 문화선전등을 강연하였다. 이는 토착여성교육운동의 효시로서 그 의미가 크다. 1923년 부인야학강습소의 명칭을 근화학원이라고 바꾸었으며, 1925년 근화여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야학, 강습소, 학원등으로 불리웠던 비정규 교육기관에서 정규교육기관으로 승격한 것이다. 근화여학교는 차미리사선생이 전국 순회 강연을 통해 모은 기부금으로 설립한 순수 민족자본학교로서 의미가 있다. 1927년 근우회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29년 조선어 사전 편찬사업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1934년 여성들의 직업교육을 위해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고 법인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근화'라는 이름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0년 62세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1948년에는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촉구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서'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인 1950년 여성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하며 덕성여자초급대학(지금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천주교로 개종한 후 1955년 6월 1일 77세로 선종하여 우이동에 안장되었으며, 2002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