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법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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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산271
탐방로그
서울 도봉구 쌍문1동 산 271 덕성여대 후문쪽 경기도 장학관 안쪽에 있는 범산 김법린 선생의 묘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梵山 金法隣 先生 墓碑(범산 김법린 선생 묘비)
생사 이미 같은것이어늘 도속이 어찌다를것이랴. 도를 닦을수록 속을 걱정하고 속에서 자눕되 도를 떠난적 없었으며 살아서 진작 죽음을 뛰어났고 죽음을 또한 삶과 같이 즐기는 이가 여기 영원한 삼매속에 누워계시니 그는 도속이 아울러 스승으로 받들던 범산 김범린공이시다. 일찍 영천 신녕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 14세에 혼허선사의 손에 출가하여 범어사와 중앙학림에서 불범을 닦으면서도 나라없는 설움에 젊은 가슴을 태우더니 마침내 1919년 3월에 산을 버리고 거리로 뛰쳐나와 불교철학과를 마치니 이는 학문연구의 마지막 학창이요 이듬해에 브륫셀에서 열리는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우리민족대표로 참석하니 이는 광복을 위한 정치할동의 첫걸름이었다. 30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혹은 교단에서 부르짖고 혹은 신문잡지에 붓을 잡으니 이는 원효의 재능을 따름이요 또 한편 만당을 조직하여 불교혁신운동을 선구하고 다시 한편 한글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일제의 악형아래서도 민족의 얼과 말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명의 기개를 이음이었다. 47세에 해방을 만나자 불교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하여 불교중흥에 새 기둥이 되었고 민주의원을 비롯하여 효시위원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원자력원장등을 역임하여 건국의 기초를 닦음에 큰 힘을 기울인재 밖에 나거서는 유엔총회 유네스코총회 국제원자력회의등에 참석하여 조국의 이름을 떨쳤었다. 그리다 마지막에는 일찌기 재단확립과 대학교 승격에 몸소 애썻던 모교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이어 총장에 취임하매 모두들 길손이 공향에 돌아옴같다하더니 문득 밤사이에 적멸속으로 들어가고 다만 남은 사람들이 그의 세상 인연 66년을 헤아리면서 대학의 이름으로 우이동에 장례지낼적에 나는 노래 삼장을 지어 그의 상여위에 얹어보냈다.
불제자 큰 서원을 가슴깊이 세우신 님 학덕을 갖추시고 바른길예셨도다. 어맂고 자비한 성품 그래 둥그시더니
정의의금강조로 일제와 싸우셨고 부드러운 웃음속에 오히려 매찬 지절 한평생 우국지성 이몸에 배시었더니
달같이 환하온 님 산넘어 기울어도 벗들의 마음 강위에 인치신 뜻과 모습 갈수록 또렸하외다 길이 비치오리다
이은상은 글을 짓고 최중길은 글씨를 쓰고 동국대학교에서 삼가 이 비를 세우다.
1966년 3월
서기 1899년 기해 8월 23일 탄생
서기 1964년 갑진 3월 14일 입적
서울 도봉구 쌍문1동 산 271 덕성여대 후문쪽 경기도 장학관 안쪽에 있는 범산 김법린 선생의 묘를 찾아왔다.
1964.03.18 동아일보7면 사회 기사이다. "묘소가 우이동 신익희 선생 묘소 건너편에 안장되었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북한산국립공원 관리공단에 문의하였지만 그 곳에는 없다고 하였다. 어렵게 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의 묘 봉분 옆에는 작은 2개의 묘비가 있었다.
密城朴氏德純之墓(밀성박씨 덕순지묘)
1906년 9월 19일 생 / 1988년 6월 20일 졸

김법린 선생의 부인 묘이다.
서울貞信女(정신여)학교와 일본고오베 松榮(송영)보육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대한부인회 회장 서울적십자사 부사장 대한불교마야 부인 회장 등을 역임하시며 이나라 여성의 권익 신장과 여성계의 발전에 공헌하시었다. 고매한 인품과 청정한 몸가짐으로 한 가정의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그리고 여성들의 지도자로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으시었다. 님의 뜻을 기리며 追慕(추모)의 情(정)을 담아 후손들이 삼가 이 碑(비)를 세웁니다.
아들 김인홍 인봉 인학 인구 인동 / 자부 하은려 / 딸 숙희 정희 복희 영희
又梵 金寧金公 仁鴻 博士 之墓(우범 김녕김공 인홍 박사 지묘)
1933년 10월 3일 생 / 2002년 12월 22일 졸

김법린 선생의 아드님 묘소이다.
선생께서는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후 미국 테네시주립대학교에서 비교 정치학을 연구하시고 동국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으셨으며 저술과 한국정치학회 이사로서 비교정치학분야의 학문발전에 공헌하시 었다. 선생께서는 일찌기 학교의 설립과 발전에 힘쓰셨던 先親 梵山 金法麟 博士(선친 김법린 박사)의 뜻을 이어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에서 교무처장 · 도서관장 · 의료원장 대학원장·부총장·총장서리 등을 역임하시며 후학 양성과 대학발전에 헌신하시었다. 봉직하시는 동안 학부 및 대학원의 교무행정을 혁신하시고 경주캠퍼스의 건설과 의료원의 육성을 앞서 이끄시어 東大發展(동대발전)의 歴史(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셨으며 이러한 功勞(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훈하시었다. 선생의 떠나가심은 동국학원 전체와 후학들의 슬픔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밝은 빛을 발하던 사표를 잃었음임에 더 크게만 느껴지는 님의 빈자리속에서 追慕(추모)의 念(념)만이 깊어갈 따름이다. 불교의 인간관을 바탕으로 절제와 헌신 그리고 고결한 인격으로 전생애를 일관하셨던 고인의 높은 뜻을 기려 선생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동국학원의 가족 후학 및 친우 그리고 그의 아내와 후손들이 함께 삼가 이 碑(비)를 세웁니다.
아들 태연 태진 / 자부 박원주 / 손녀 연주 남주
딸 지연 / 사위 현승훈 / 외손녀 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