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5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朱基徹 牧師 殉敎紀念碑(주기철 목사 순교기념비)
주기철목사 추모문
태산같이 믿었던 청국이 일본군에 대패하고 민비가 일인 폭도들에게 시해되고 청일로 3국의 식민지정책의 틈바구니에 끼어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마붓거리며 민심이 극도로 소란하던 1895년에 경상남도 창원군 능천면 북부리 511번지에서 소양 주기철목사가 태어나다. 그의 부친은 주현성장로요 모친은 조재선여사였다. 시골에서 개통보통학교에 다닐무렵 조국은 이미 일인의 손에 넘어갔고 많은 애국지사들은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기철목사는 기독교의 복음으로써 조국을 재건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당시 기독교신앙인으로써 조국을 위한 인재양성기관으로 정평이 나 있던 정주 오산학교에 갔다 거기서 주기철목사는 남강 이승훈의 민족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재학시절 그는 뛰어난 재질과 감화력있는 웅변술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기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들어갔으나 안질을 앓은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중퇴하고 1921년에 평양에 있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교에 들어가게된 동기에 대하여 그는 말했다. "참 애국은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보다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내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참 애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과연 그는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길을 배우고 애국하는 훈련을 충분히 받았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첫목회지인 부산초량교회로 갔다. 1925년 그의 나이
태산같이 믿었던 청국이 일본군에 대패하고 민비가 일인 폭도들에게 시해되고 청일로 3국의 식민지정책의 틈바구니에 끼어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마붓거리며 민심이 극도로 소란하던 1895년에 경상남도 창원군 능천면 북부리 511번지에서 소양 주기철목사가 태어나다. 그의 부친은 주현성장로요 모친은 조재선여사였다. 시골에서 개통보통학교에 다닐무렵 조국은 이미 일인의 손에 넘어갔고 많은 애국지사들은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기철목사는 기독교의 복음으로써 조국을 재건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당시 기독교신앙인으로써 조국을 위한 인재양성기관으로 정평이 나 있던 정주 오산학교에 갔다 거기서 주기철목사는 남강 이승훈의 민족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재학시절 그는 뛰어난 재질과 감화력있는 웅변술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기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들어갔으나 안질을 앓은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중퇴하고 1921년에 평양에 있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교에 들어가게된 동기에 대하여 그는 말했다. "참 애국은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보다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내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참 애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과연 그는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길을 배우고 애국하는 훈련을 충분히 받았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첫목회지인 부산초량교회로 갔다. 1925년 그의 나이
30세 되던 해였다. 그때까지 미약했던 교회가 그가 6년간 목회하는 동안에 300명으로 성장했다. 그는 목회하는 한편 진주성경학교와 경남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으며 그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손양원(순교) 이정심(순교) 김재선 박손혁 한상동등 훌륭한 목회자와 순교자들이 있다. 그가 초량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하여 일본인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1932년부터 주기철목사는 마산 문창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갔다. 거기서도 그는 교회를 크게 부흥케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 안감수여사가 남편과 아들 4형제를 남겨놓은채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얼마후에 앞서 간 안부인의 유언에 따라 마산 의신여학교의 오정모교사와 재혼하게 되었다. 1936년부터 주기철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성공적이고 결실이 많은 목회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시작했을 때이며 국내의 치안유지를 빙자하여 한국인에 대한 철권정치를 시작한 때였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철저하게 거부한 주목사에 대한 감시와 취체가 심하여 1938년 5월 8일 성전건축헌당식을 하려는 직전에 구속되어 그는 헌당식에 참여 하지도 못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문제로 양파 분열되어 있었다. 평양에 있던 기독교친목회와 서울에서 생긴 혁신교단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마침내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가졌던 조선야소교 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는 죄과를 범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주목사는 일사각오를 결심했다. 1938년 2월 어느날 신학교에서 다음과 대지의 설교를 했다.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부활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총회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통탄을 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한국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너에게서 떠나가는도다. 우뚝 솟은 모란봉아 통곡하여라 대동강아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라 이 미천한 목숨이나마 주님 위하여 제물로 드리리라" 과연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던 평양의 영광은 그때 땅에 떨어졌으며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의 전당이 들어서고 말았다.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주기철목사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오정모여사는 어려운 가정살림에도 불구하고 기도로써 말로써 주목사를 격려했다. 1944년 4월 21일 그는 복음의 절대성을 지키기 위하여 혼신투쟁을 계속하다가 돌아보는 친지도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
나라로 가고 말았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너무나도 짧은 일생이었다. 그러나 엄청나게도 위대한 성업을 완수했다. 그는 복음의 세계주의와 애국의 민족주의를 겸비한 정의의 주인공이었다. 한국교회가 시작된지 60년만에 처음 나타난 순교의 용사요 일백년사를 빛내는 신앙의 새벽별이며 세계선교를 향한 한국교회의 샘터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기철목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신앙의 사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순교한지 39년이 되는 이날에 이 비를 세워 후진들에게 그의 빛나는 십자가의 삶을 전해 주고자 한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 353 장로회신학대학교 소양 주기철기념관 앞 동산 위 주기철목사 순교기념비를 찾아왔다.
주기철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