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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좌동 산 1 장산. 다행스럽게 모정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입구에서 한참 올라간 후에 애국지사 강근호님의 집이라는 안내판을 만날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입구에서 한참 올라간 후에 애국지사 강근호님의 집이라는 안내판을 만날 수 있었다.
군수사령부 장병 일동 - 2003.7.17.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추모비(현충시설 안내)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0-1-22(2003.9.) / 관리자 :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유족
강근호(姜槿虎:異名 姜華麟, 1898-1960) 지사는 함남 정평 출신으로 1916년 학생 소요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무장독립군의 산실인 신흥(新興)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6월 이장령(李章寧) 참모장과 함께 북로군정서에 부임하여 사관연성소 교관 및 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청산리전역(戰役)에서는 대한군정서 제1중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중대원을 지휘하여 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 1921년 5월 시베리아 흑하사변,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 교관, 1926년부터 민족적 사회주의 독립운동 등으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다가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에 귀국한 선생은 1949년 2월 52세의 나이로 육사(8기, 특별14차)에 입교, 장교(군 13193)가 되어 건군과 6·25를 거쳐 1956년 5월 제103사단 제118연대장(중령)으로 전역하였다. 1960년 2월 영도 영선동에서 63세로 작고한 선생의 유해(遺骸)는 1964년 이곳 장산으로 모셔왔다가 1990년 12월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 건국포장(제955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제103호)이 추서되었으며, 2000년 4월 육군 제53사단 장병일동은 선생의 유택지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이름도 없이 사라졌던 선생의 애국혼은 2002년에 전기(傳記) 『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이 출판되어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추모비는 2003년 9월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었으며, 평생을 항일독립운동과 진충보국(盡忠報國)에 받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5년 4월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오늘에 이른다.
관리번호: 40-1-22(2003.9.) / 관리자 :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유족
강근호(姜槿虎:異名 姜華麟, 1898-1960) 지사는 함남 정평 출신으로 1916년 학생 소요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무장독립군의 산실인 신흥(新興)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6월 이장령(李章寧) 참모장과 함께 북로군정서에 부임하여 사관연성소 교관 및 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청산리전역(戰役)에서는 대한군정서 제1중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중대원을 지휘하여 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 1921년 5월 시베리아 흑하사변,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 교관, 1926년부터 민족적 사회주의 독립운동 등으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다가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에 귀국한 선생은 1949년 2월 52세의 나이로 육사(8기, 특별14차)에 입교, 장교(군 13193)가 되어 건군과 6·25를 거쳐 1956년 5월 제103사단 제118연대장(중령)으로 전역하였다. 1960년 2월 영도 영선동에서 63세로 작고한 선생의 유해(遺骸)는 1964년 이곳 장산으로 모셔왔다가 1990년 12월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 건국포장(제955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제103호)이 추서되었으며, 2000년 4월 육군 제53사단 장병일동은 선생의 유택지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이름도 없이 사라졌던 선생의 애국혼은 2002년에 전기(傳記) 『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이 출판되어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추모비는 2003년 9월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었으며, 평생을 항일독립운동과 진충보국(盡忠報國)에 받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5년 4월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오늘에 이른다.
애국지사 故(고) 姜槿虎(강근호)님, 未亡人(미망인) 李丁熙(이정희) 여사님의 家(가)
고 강근호 지사님은 만주3.1운동, 청산리전투, 시베리아 가우시 전투 등의 선봉에서 광복조국을 기약하며 항일투쟁의 깃발을 드높이셨습니다. 광복 후에는 진충보국의 일념으로 육사에 입교 연대장으로 전역하시기까지 6.25동란 등에서 불꽃같은 투혼으로 혁혁한 무공을 남기시었으며 미망인 이성희 여사님 또한 6.25동란의 고귀한 희생정신으로 여군에 자원 입대하여 많은 공훈을 남기셨습니다.
두분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은 우리 진충부대 전우들에게 살아 숨쉬는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었기에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2000.4.13 제53보병사단 장병 일동
고 강근호 지사님은 만주3.1운동, 청산리전투, 시베리아 가우시 전투 등의 선봉에서 광복조국을 기약하며 항일투쟁의 깃발을 드높이셨습니다. 광복 후에는 진충보국의 일념으로 육사에 입교 연대장으로 전역하시기까지 6.25동란 등에서 불꽃같은 투혼으로 혁혁한 무공을 남기시었으며 미망인 이성희 여사님 또한 6.25동란의 고귀한 희생정신으로 여군에 자원 입대하여 많은 공훈을 남기셨습니다.
두분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은 우리 진충부대 전우들에게 살아 숨쉬는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었기에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2000.4.13 제53보병사단 장병 일동
1960년 영도구 영선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신 후
1963년 장산 이 자리에 이장되시고
1990년 12월 7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음
1963년 장산 이 자리에 이장되시고
1990년 12월 7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음
애국지사 姜槿虎 之墓(강근호 지묘)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주요연보
-1898. 11. 3 함경남도 정평면 신상면 조양리 277번지에서 출생
-1913. 정평군 신상면 천명소학교 졸업
-1916. 사립 함남중학교 3학년 재학중 반일학생사건으로 만주로 망명
-1919. 3. 13 만주 용정 3.1만세운동에 참가
-1919. 10. 7 신흥무관학교 입교
-1920. 1. 30 신흥무관학교 수료
-1920. 4. 신흥무관학교 이장령 전 교장의 천거로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요원으로 발탁
-1920. 10. 21 청산리전투를 비롯하여 10여 차례 대소전투에서 보병 제1중대장으로 참전
-1921. 6. 28. 시베리아 자유시 흑하사변에서 적로군에게 포로가 되어 수형생활
-1922. 8. 9. 상해 임시정부의 항의로 레닌이 지시하여 지청전 장군, 오광선 장군과 함께 석방
-1924. 만주 용정 영신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
-1926. 북만주 조선인청년총동맹 학우단 단장
-1931-1944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된 후 만주 독립군 내부의 좌우분열로 인하여 만주와 시베리아로 유랑생활
-1945. 10. 만주 연길현 명월구 소재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소 교관
-1947. 귀국. 수원 소재 대한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관으로 근무
-1949. 2. 21. 육군사관학교 제8기 4차로 입교(당 52세)
-1950. 5. 1. 육군 대위 진급
-1951. 4. 1. 육군 소령 진급 후 제103근무사단 제121연대 연대장
-1953. 4. 여 군속으로 근무 중인 이정희와 결혼
-1953. 9. 1.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제103근무사단 참모장
-1955. 6. 18. 제103 근무사단 제118연대 연대장
-1956. 5. 31. 육군 중령으로 전역(당 59세)
-1960. 2. 24. 영도구 영선동 1가에서 작고(향년 63세), 봉래산에 가매장
-1964. 해운대 장산으로 이장
-1990.12. 7. 대전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2000. 4. 13. 육군 제53사단에서 해운대 장산에 추모비 건립
-2002. 9. 25. 『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 전기 출간
-2005. 4. 17.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 발족
▲ 연대장시절
▲ 청산리전투 승진 축하 기념사진
▲ 김근호 애국지사가 1년간 투옥된 이르쿠츠크 러시아 군형무소
▲ 미국 동성무공훈장 수여식(1954. 11)
◀ 육군 제103사단 제118연대 부대참모들과 기념촬영
-1898. 11. 3 함경남도 정평면 신상면 조양리 277번지에서 출생
-1913. 정평군 신상면 천명소학교 졸업
-1916. 사립 함남중학교 3학년 재학중 반일학생사건으로 만주로 망명
-1919. 3. 13 만주 용정 3.1만세운동에 참가
-1919. 10. 7 신흥무관학교 입교
-1920. 1. 30 신흥무관학교 수료
-1920. 4. 신흥무관학교 이장령 전 교장의 천거로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요원으로 발탁
-1920. 10. 21 청산리전투를 비롯하여 10여 차례 대소전투에서 보병 제1중대장으로 참전
-1921. 6. 28. 시베리아 자유시 흑하사변에서 적로군에게 포로가 되어 수형생활
-1922. 8. 9. 상해 임시정부의 항의로 레닌이 지시하여 지청전 장군, 오광선 장군과 함께 석방
-1924. 만주 용정 영신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
-1926. 북만주 조선인청년총동맹 학우단 단장
-1931-1944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된 후 만주 독립군 내부의 좌우분열로 인하여 만주와 시베리아로 유랑생활
-1945. 10. 만주 연길현 명월구 소재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소 교관
-1947. 귀국. 수원 소재 대한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관으로 근무
-1949. 2. 21. 육군사관학교 제8기 4차로 입교(당 52세)
-1950. 5. 1. 육군 대위 진급
-1951. 4. 1. 육군 소령 진급 후 제103근무사단 제121연대 연대장
-1953. 4. 여 군속으로 근무 중인 이정희와 결혼
-1953. 9. 1.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제103근무사단 참모장
-1955. 6. 18. 제103 근무사단 제118연대 연대장
-1956. 5. 31. 육군 중령으로 전역(당 59세)
-1960. 2. 24. 영도구 영선동 1가에서 작고(향년 63세), 봉래산에 가매장
-1964. 해운대 장산으로 이장
-1990.12. 7. 대전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2000. 4. 13. 육군 제53사단에서 해운대 장산에 추모비 건립
-2002. 9. 25. 『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 전기 출간
-2005. 4. 17.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 발족
▲ 연대장시절
▲ 청산리전투 승진 축하 기념사진
▲ 김근호 애국지사가 1년간 투옥된 이르쿠츠크 러시아 군형무소
▲ 미국 동성무공훈장 수여식(1954. 11)
◀ 육군 제103사단 제118연대 부대참모들과 기념촬영
애국지사 강근호(姜槿虎)선생은
본명: 강근호(아명(兒名) 강난선(蘭善), 이명(異名) 강화린(華麟), 강화인(化仁))
1898년 11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 277 번지에서 부친 강형석(姜亨錫)과 모친 신해운(申海雲)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16년 만주로 망명, 1920년 초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 구대장과 교관을 역임한 청산리전역(靑山里戰役)의 한 분이었다. 청산리전투라 하면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과 개인회고록을 남긴 철기 이범석 연성대장을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전사(戰士)는 거의 없다. 청산리 전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조국독립을 위해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650여명에 달하는 무장독립군의 활약상은 아직도 묻혀 있다. 여기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도 한동안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강근호 애국지사의 조국광복 투쟁은 지난 2002년 그의 전기 「만주벌의 이름없 는 전사들』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독립 후 선생의 나이 52세 때인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제8기 4차로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한국동란에 참전하는 등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하고 1956년 육군중령으로 전역하였다. 부산으로 이주한 선생은 영도구 영선동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1960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생전에 젊은 부인 이정희 여사에게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청산리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서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씀을 유언처럼 남긴 강근호 애국지사. 처음엔 그의 유해를 제대로 눕힐 공간이 없어 영도 봉래산에 가매장한 것을 1964년 장산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26여 년 동안 아내가 세워준 비목(碑木) 곁에 잠들어 있다가 지난 1990년 드디어 대한민국 건국 애국훈장이 추서되었고, 그 해 12월 7일에 대전 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용사는 죽어서 말한다.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은 죽어서 우리곁에 더 가까이 다 가선 인물이다. 파란만장한 선생의 인생역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서 숨쉬는 그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만날 수 있다.
이정희(李熙) 여사와 모정원(母情苑)
이정희 여사는 1932년 충남 대덕군 진잠면 송정리에서 성재 이시영 부통령의 손자 이상룡 선생의 차녀로 태어났다. 대전 대동여고 5학년 재학 중에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중에 이시영 부통령을 찾아 단신 대구로 피난한 소녀는 1950년 7월 학도의용군에 자원입대 하였고, 8월에는 왜관 제2보충대에 파견되어 국군장병 모집과 선무방송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하자 그해 12월 1일에는 여군 제2기로 자원입대(군번 0995753번)하여 국군 제1군단(군단장 김백일 장군)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여군용사가 되었다.
1953년 4월 강원도 양구에서 제103사단 제121연대 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강근호 지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어 곧 예편,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1960년 2월 24일 남편이 부산 영도 영선동 판자집에서 63세로 작고하자 미군의 도움으로 전쟁고아와 미망인의 복지향상을 위해 성가보육원(1960~1963년)과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재건국민운동 동래구 부위원장(1961~1963년)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1963년부터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해운대 장산으로 들어와 장산개척 단장(1963~1970년)으로서 생태계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자갈밭을 개간하여 푸른 농토를 만드는 데 헌신하기도 했다.
모정원은 당시 그녀가 생활의 근거지로 삼아온 이곳을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으로 이름짓고, 365일 뜰을 가꾸고 지키면서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애국혼(愛國魂)을 불어 넣어주는 여장부로 만년을 보내고 있다.
본명: 강근호(아명(兒名) 강난선(蘭善), 이명(異名) 강화린(華麟), 강화인(化仁))
1898년 11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 277 번지에서 부친 강형석(姜亨錫)과 모친 신해운(申海雲)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16년 만주로 망명, 1920년 초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 구대장과 교관을 역임한 청산리전역(靑山里戰役)의 한 분이었다. 청산리전투라 하면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과 개인회고록을 남긴 철기 이범석 연성대장을 제외하면 널리 알려진 전사(戰士)는 거의 없다. 청산리 전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조국독립을 위해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650여명에 달하는 무장독립군의 활약상은 아직도 묻혀 있다. 여기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도 한동안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강근호 애국지사의 조국광복 투쟁은 지난 2002년 그의 전기 「만주벌의 이름없 는 전사들』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독립 후 선생의 나이 52세 때인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제8기 4차로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한국동란에 참전하는 등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하고 1956년 육군중령으로 전역하였다. 부산으로 이주한 선생은 영도구 영선동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1960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생전에 젊은 부인 이정희 여사에게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청산리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서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씀을 유언처럼 남긴 강근호 애국지사. 처음엔 그의 유해를 제대로 눕힐 공간이 없어 영도 봉래산에 가매장한 것을 1964년 장산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26여 년 동안 아내가 세워준 비목(碑木) 곁에 잠들어 있다가 지난 1990년 드디어 대한민국 건국 애국훈장이 추서되었고, 그 해 12월 7일에 대전 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용사는 죽어서 말한다.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은 죽어서 우리곁에 더 가까이 다 가선 인물이다. 파란만장한 선생의 인생역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서 숨쉬는 그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만날 수 있다.
이정희(李熙) 여사와 모정원(母情苑)
이정희 여사는 1932년 충남 대덕군 진잠면 송정리에서 성재 이시영 부통령의 손자 이상룡 선생의 차녀로 태어났다. 대전 대동여고 5학년 재학 중에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중에 이시영 부통령을 찾아 단신 대구로 피난한 소녀는 1950년 7월 학도의용군에 자원입대 하였고, 8월에는 왜관 제2보충대에 파견되어 국군장병 모집과 선무방송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하자 그해 12월 1일에는 여군 제2기로 자원입대(군번 0995753번)하여 국군 제1군단(군단장 김백일 장군)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여군용사가 되었다.
1953년 4월 강원도 양구에서 제103사단 제121연대 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강근호 지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어 곧 예편,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1960년 2월 24일 남편이 부산 영도 영선동 판자집에서 63세로 작고하자 미군의 도움으로 전쟁고아와 미망인의 복지향상을 위해 성가보육원(1960~1963년)과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재건국민운동 동래구 부위원장(1961~1963년)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1963년부터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해운대 장산으로 들어와 장산개척 단장(1963~1970년)으로서 생태계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자갈밭을 개간하여 푸른 농토를 만드는 데 헌신하기도 했다.
모정원은 당시 그녀가 생활의 근거지로 삼아온 이곳을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으로 이름짓고, 365일 뜰을 가꾸고 지키면서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애국혼(愛國魂)을 불어 넣어주는 여장부로 만년을 보내고 있다.
母情苑(모정원)
모정원은 강근호장군이 타계한 이후 이곳에서 생활터를 잡고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의 모정원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정희여사는 해운대구 장산을 울창한 숲을 가꾸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1964년 당시 벌거숭이 같은 장산에 들어와 살면서 제대 군인을 모아 '장산개척단'을 조직해 야산 20만평을 개간하여 오늘날 울창한 장산숲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모정원은 강근호장군이 타계한 이후 이곳에서 생활터를 잡고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의 모정원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정희여사는 해운대구 장산을 울창한 숲을 가꾸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1964년 당시 벌거숭이 같은 장산에 들어와 살면서 제대 군인을 모아 '장산개척단'을 조직해 야산 20만평을 개간하여 오늘날 울창한 장산숲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정원의 주인은 현재 고령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고 한다.
부산 해운대구 좌동 산 1 장산. 모정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장산의 역사 | the history of jang san
장산(634m)은 동·남해를 바라보며, 가파르게 우뚝 솟은 해운대의 진산(鎭山)이다. 장산 이름의 유래는 '거칠다'라는 의미와 거친 복숭아(돌복숭아)가 생산되는 나무가 많아 장산이라 하였다. 태백산 끝자락에서 그 정기를 이어받은 달음산(기장군 일광면)에서 장산-금련산-황령산-봉래산(영도)으로 이르는 금련산맥에서 가장 높이 치솟아 위풍을 자랑하고 있다. 장산의 나이는 대략 6천 2백만~7천 4백만년 전에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산이다. 이 때 지축을 울리는 폭발음과 화산재를 지상 20km 상공까지 치솟아 올린 폭발형 화산이다. 그 전까지 장산일대는 거대한 공룡들이 한가롭게 살았던 분지였다.
장산 억새밭 일대 분지에는 삼한시대 장산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동래부지≫ 산천조에 '상산(上山, 웃뫼)을 장산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의 15리에 있으며, 대마도를 바라보기 가장 가깝다. 산의 정상에 평탄한 곳이 있고, 그 가운데가 저습한데 사면이 토성과 같은 형상이며 둘레가 2천여보가 된다. 전해오기로 장산국기(장산국의 터)라고 한다'고 하였다. '간비오봉수대는 장산의 한 지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 일단 멈춰 동남쪽으로 형성된 간비오봉(147.9m)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봉수는 높은 산에서 불을 피워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제도이다. 간비오봉수대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관장했고 조선 초부터 조선 말(1894년)까지 봉수를 올렸으며 황령산봉수대의 연락을 받아 기장 남산봉수대로 연락되는 경상 좌도의 간봉 기점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해운대구청장
장산(634m)은 동·남해를 바라보며, 가파르게 우뚝 솟은 해운대의 진산(鎭山)이다. 장산 이름의 유래는 '거칠다'라는 의미와 거친 복숭아(돌복숭아)가 생산되는 나무가 많아 장산이라 하였다. 태백산 끝자락에서 그 정기를 이어받은 달음산(기장군 일광면)에서 장산-금련산-황령산-봉래산(영도)으로 이르는 금련산맥에서 가장 높이 치솟아 위풍을 자랑하고 있다. 장산의 나이는 대략 6천 2백만~7천 4백만년 전에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산이다. 이 때 지축을 울리는 폭발음과 화산재를 지상 20km 상공까지 치솟아 올린 폭발형 화산이다. 그 전까지 장산일대는 거대한 공룡들이 한가롭게 살았던 분지였다.
장산 억새밭 일대 분지에는 삼한시대 장산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동래부지≫ 산천조에 '상산(上山, 웃뫼)을 장산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의 15리에 있으며, 대마도를 바라보기 가장 가깝다. 산의 정상에 평탄한 곳이 있고, 그 가운데가 저습한데 사면이 토성과 같은 형상이며 둘레가 2천여보가 된다. 전해오기로 장산국기(장산국의 터)라고 한다'고 하였다. '간비오봉수대는 장산의 한 지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 일단 멈춰 동남쪽으로 형성된 간비오봉(147.9m)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봉수는 높은 산에서 불을 피워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제도이다. 간비오봉수대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관장했고 조선 초부터 조선 말(1894년)까지 봉수를 올렸으며 황령산봉수대의 연락을 받아 기장 남산봉수대로 연락되는 경상 좌도의 간봉 기점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해운대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