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3.1독립운동기념탑

4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산93-2
탐방로그
부산 동래구 명장동 산 93-2 마안산공원 내에 있는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을 찾아왔다.
다른 자료에는 이곳이 동래읍성공원으로 되어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부산 3.1독립운동 약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가 우리의 자주독립을 온 천하에 선언하자 부산 각처에서도 격렬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1일 밤 일신여학교 학생이 좌천동 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수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이 의거는 부산지방 3.1독립운동의 첫 봉화가 되었다. 3월 13일 동래 장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수천 민중의 봉기가 있었으며 3월 18일과 19일 동래 시장의 시위에는 범어사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립 학생과 군중이 합류하여 시위를 벌였다. 3월 29일 구포 장날 대형 태극기와 현수막을 앞세운 수많은 군중의 대규모 집회와 경찰 파출소 습격이 있었고 4월 5일 기장읍 장날 1천여명이 궐기하였으며 잇달아 장안면과 일광면 정관면에서도 농민과 장꾼이 합세한 가두 시위가 있었다. 4월 10일 명지의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이 밖에도 부산상업학교 부산진보통학교 영도옥성학교 학생들의 구국거사와 의열청년들의 열차 투석 전차 운전자들과 철도직공들의 항일동맹파업 및 시민들의 항쟁이 5월까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산 각 지역의 독립투쟁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인원은 2백명이 넘었고 실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1백50명에 이르렀으며 이같은 민족투지는 조국독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1996년 3월 1일 이태길 최해군 짓고 조영조 쓰다.
부산 3·1 독립운동기념탑 건립 취지문
여기 이 탑은 내 고장 내 겨레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깨우쳐 줌에 있다고 하겠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 총칼 앞에 나라가 넘어지고 10여 성상이 지나도 끈질긴 민족의 저항은 멎지 않았으니 하늘인들 어찌 무심할 수 있었으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사의 새 흐름을 타고 온 민족은 가슴에 한을 품고 때를 기다렸다. 1919년 3월 1일 드디어 일어서니 독립을 외치는 만세 소리는 서울 하늘에 메아리치고 태극기는 온 거리를 뒤덮었으며 의거의 소식은 이내 백두대간을 타고 남북으로 내리치달았다. 10일에 이르러 만세 운동은 부산 전역으로 퍼져갔고 항쟁은 고장을 옮겨가며 이어졌다. “일본은 물러가라, 대한 독립 만세” 피와 먹으로 얼룩진 깃발을 앞세우고 민중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거머쥐고 만세를 외쳤다. 총칼 앞에 죽음을 무르쓴 민중의 분노는 성난 파도와 같았으며, 산마루의 봉화는 삼천리를 누볐고 만세꾼은 동서로 줄달음쳐 항거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밤낮으로 이어져 독립의 의지는 불꽃처럼 타오르니, 이 어찌 한겨레의 승리가 아니랴. 총칼과 맨주먹의 싸움이 어찌 단판에 이길 수 있으랴만, 일제는 마침내 통치 방법을 바꾸었고, 겨레는 비로써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나니 이 일을 영원히 잊지 말자.
우리는 이 탑 앞에서 자주독립과 조국 번영의 각오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1996년 3월 1일 박지홍 짓고 배재식 쓰다.
부산 동래구 명장동 산 93-2 마안산공원 내에 있는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을 찾아왔다.
다른 자료에는 이곳이 동래읍성공원으로 되어있다.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호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안락동 명륜동·칠산동·명장동 일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國盧)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는 1021년(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 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 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문에도 옹성(壅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 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과 인생문·동장대·서장대·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여장(女牆)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보수중이다.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 1919년에 동래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일본에 맞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1996년 3월 1일 공사를 마쳤다.
● 일제 강점기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화산처럼 타오르던 만세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동래구 명장2동 산 93-10번지 일대의 동래사적공원 안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는 마안산 정상 동쪽의 산봉우리에 있다.
● 이 탑은 부지 2,310㎡에 높이 21.6m이며, 독립운동 모습을 새긴 동상의 높이는 6m이다. 이 기념탑의 모서리 부분에는 기념탑 건립 취지문,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과 독립운동의 간략한 역사 등이 새겨져 있다.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釜山 3.1 獨立運動 記念塔]

국가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40-1-19
관리자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위치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산 93-10번지

이 기념탑은 1919년 부산에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8월 15일 착공, 1996년 3월 1일 완공하였으며 만세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마안산에 세워졌다. 부산광역시에서는 3.1독립운동 당시의 민족기상과 나라사랑을 드높인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을 기리고, 선열의 숭고한 뜻과 얼을 받들어 부산지역의 항일민족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탑을 세웠다.이 탑은 부지가 2,310, 탑 전체 높이 21.6m, 좌대는 842㎡이며, 독립운동 모습을 새긴 높이 6m의 원추형 군상에는 기미독립선언서 공약3장이, 탑 기둥에는 건립취지문, 독립운동 약사가 새겨져 있다.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부산 3.1독립만세 운동가

구수암 권철암 김귀룡 김기삼 김달수 김도엽 김반수
김봉추 김성조 김애련 김영규 김영서 김옥겸 김용구
김윤희 김인호 김한기 박두천 박성봉 박영준 박영환
박정국 신두성 심순의 양수근 양태용 엄병영 엄진영
오기원 윤경봉 윤삼동 윤장수 윤정은 이갑이 이상덕
이수열 임명조 임봉래 정성언 정호종 차상명 추규영
김윤길 박성태 최익수

여기 천지를 뒤흔드는 '대한독립만세'
이 함성은 침략자 일제에 항거한 우리 겨레의 피맺힌 절규였다.
민족자존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한 선언이었다.
님들은 오직 한길 나라사랑에 온 신명을 바쳐
위대한 조국광복을 이룩하였나니.
올곧은 그 정신 그 뜻 고이 받들어 여기 새겼사오니
영광스러운 대한의 이름으로 길이 빛나소서! 영원하소서!
솔뫼 최해군 짓다.
부산 3·1독립만세운동에 수많은 분들이 참여하였으나 여기에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은 분들의 이름을 새겨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2008년 2월 1일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