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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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96-2
탐방로그
부산 동구 좌천동 496-2 항일독립유공자 정오연 생가터 안내판을 찾았다.

이 부근에는 많은 애국지사 사적이 있어서 여러 번 왔었는데, 전혀 알지 못했었다.

생가 안쪽에도 정오연 지사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사님의 동생 부인이 운영을 하고 계셨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차병곤 정오연 박정오
'부산시사; 제1권 제3절 일제침략과 부산의 독립운동 1045쪽에 부산진교회 학생 차병곤, 정오년 등에 대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피검수감
이러한 경위로 8월 1일 부산과 동래에 있던 모든 단원(주:순국단)이 북구서에 피검되고 길주까지 갔던 4명도 7월 28일 오후 8시경 부산지검 요다검사의 전보 영장을 제시, 가진 고문과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겼었다. 그 끝에 긴 미결수 생활이 시작되었다(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자의 검사구류기간은 1년이었다). 죄목은 독립운동 비밀결사조직 치안유지법 위반등이었다. 만1년을 다 채운 1945년 8월 1일, 지검에서 주동자 차병곤 박정오 신정오 등 3인은 기소되고 8명(김수성 김진옥 남정기 박태권 전창오 배봉수 윤창석 아사모드)은 기소유예 처분으로 출감되었으나 이들도 귀가 시킨것이 아니고 사법보호료 즉 강제 퇴거된 호주선교사인 일신여학교 교장 사택이 당시 비어있는 것에 옮겨져서 일반 기결수들과 같이 부두작업에 투입했다가 8.15해방을 맞이했으며, 기소 회부되었던 차병곤 박정오(부단장), 신정오등은 8월 18일 기각처분되어 석방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북서와 부산형무소에서 당한 일을 회상하면서 몸서리를 치며 오늘날까지도 가끔 고문당한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순국당의 수사과정에서 조선독립당도 탄로가 나서 모두 검거되었다.
여기서 부기할 것은 부산형무소 수치감에서 만1년간 수감되어 있는동안 누구도 한번의 가족면회가 되지 않았으며 차병곤, 박정오, 김수성, 신정호는 그 어린 나이에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45년 몸에 정오연을 장질주사로 옥사했으며 배광진도 이어서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수일만에 사망했다. 차병곤도 석방 한달도 못되어 병사했다. 차병곤의 영결식은 경남건국준비위에서 사회장으로 결정, 부산진교회 주관으로 이루어 졌는데 당시 민주중보(1945년 9월 21일) 사회면에 '민족해받의 용사 순국당 단장 최병곤 군 영결식'이란 3단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는 '영결식에 우국당원 동지 경남장로회 조선소년대 부산진치안댕원 등 500여명이 참석했고 장지 좌천동 공동묘지로 향했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받은 마지막 대접이었다. 이 밖에 김진옥 외 3명(신정오, 박태권, 아사모도)은 그 당시의 혹독한 옥고 후유증으로 고생했다가 수를 다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으며 13명 중 생존자는 6명 뿐이다.(후략)
아래 글은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 정지사의 동생 부인께서 시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며 직접 만드신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엄마를 안아도 손가락은 없다.
차가운 형무소 안에서 얼마나 얻어 맞아 열병을 토하고 있는데 엄마가 자식 먹이려고 이것 저것 음식을 만들어 내 새끼 먹게 할려고 찾아갔더니 문 앞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형무소 간수 입에만 좋은일 하다 돌아온지 몇번인가?
9남5녀중 제일 사랑스럽던 내 아들 다섯번째 아들 오연아! 나라를 위해 이 큰일을 해 냈구나 그러나 묵숨까지 나라위해 바쳐 이 애미 가슴은 멍이 시커멓구나 열손가락 깨물에 안 아픈 손가락이 없어 가난한 시절 애미 입에는 아무것도 먹을것은 끼니마다 물 하사발 유난히 다섯번째 손가락은 너무 아파 가슴마저 저며 오는구나
내 마음은 아프다가 이제는 엄마란 이름 갈곳 없어 타다 남은 숫덩어리가 숫가루가 되어 훨 훨 날아 어느 나무 가지에 앉아 내 아들의 혼이 엄마 찾아 오려므나
부산 동구 좌천동 496-2 항일독립유공자 정오연 생가터 안내판을 찾았다.
이 부근에는 많은 애국지사 사적이 있어서 여러 번 왔었는데, 전혀 알지 못했었다.
정오연(1928.4.5~1945.5.9, 만 17세)
1943년 봄 부산공업학교 재학 중 국민학교 동창생인 차병곤(車炳坤)·박정오(朴禎五) 등이 주도한 독서회(讀書會)에 가입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이후 이들은 동지를 포섭함으로써 조직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44년 5월 1일에 독서회를 비밀결사 순국당(殉國黨)으로 개편·발전시켰다. 순국당이란 명칭은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조국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때 순국당의 강령은 '민족독립·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다'였으며, 행동 목표로 총독 처단·군사시설 파괴·일인 집단거주지 방화 등을 설정하였다. 이같은 행동 목표는 순국당이 단순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교내에 머무는 학생운동조직이 아니라 독립군적 조직으로 전환해 갔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이들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들면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국독립에 대비한 운동방침을 세워갔는데, 그는 폭약 연구책을 맡았다. 또한 그는 차병곤 등과 함께 부산 시내 영도다리에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과 경계를 뚫고 국내에서 무력투쟁을 전개하기가 여의치 않자, 이들은 중국으로 넘어가 광복군(光復軍)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해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7월 1차 선발대로 차병곤 등이 국경을 넘어 중국 길림(吉林)에 무사히 도착하고 뒤이어 2진이 출발했으나,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5월 9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생가 안쪽에도 정오연 지사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사님의 동생 부인이 운영을 하고 계셨다.
순국당가
一 동월 동일 동시에 이 내 몸 죽자고 용감한 이팔 소년 맹세를 하고
二 자유에 구속받은 우리 민족 아름다운 강산에 꽃이 피도록
三 우리들은 순국당 단결하여서 끝까지 싸우리라 조국을 위하여
광복 50주년을 맞아 故 정오연 형님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애국정신을 추모하며 弟 성인
사진도 없었는데, 학교에서 졸업사진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주셨다.
순국당
일본 군사시설 폭파 목적으로 부산진교회 기독학생들이 결성한 순국당원들이 거사 직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당수 차병곤, 폭파담당 정오연 등은 극심한 옥중 고민으로 병보석(1944)후 곧 세상을 떠나 사회장을 하였다.

순국당사건 정오연 의사 명예졸업
일제 치하인 1944년 순국당사건으로 옥사한 정오연의사(당시 부산공립직업학교 2년)가 순국한지 51년만에 졸업장을 받게되었다. 부산공립직업학교의 후신인 부산공업대(총장 한상숙)는 지난 25일 교내 대강당에서 '정오연의사 명예졸업장 수여식'을 가졌다. 폭약연구책이었던 그는 44년 7월 동료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된 뒤 그해 겨울 17세의 어린 나이에 고문으로 옥사했다. 그러나 정의사의 활약상은 오랫동안 묻혀져오다 해방 50주년을 맞능 올해에서야 비로소 애국장이 추서돼 빛을 보게됬다. 그의 유해는 형무소에서 화장된 뒤 뿌려져 가족들은 그의 머리카락조차 보지못했다. 지난해부터 그의 흔적찾기에 아선 동생 성연씨(57, 부산 동구 좌천동)는 정부문서보존소와 보훈처 학교(부산공업대)를 모두 뒤졌으나 자료를 찾아 못하다가 학적부에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북서에 검속중'이란 구절을 발견. 서훈을 추서하게 됬다고 말했다. 성연씨는 '일경이 모든 신상자료를 압수해 버리는 바람에 사진 한장 남아있지 않았는데 올초 모교인 부산진국교의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졸업앨범에서 간신히 형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손톱이라도 남아있으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는데..라며 아쉬워 했다. 부산공업대는 이날 수여식에서 졸업장과 함께 기념품을 동생 성연씨에게 전달하고 교내에 정의사의 고귀한 죽음을 기리는 기념비 설립작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