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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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247-2
탐방로그
묘소 안내판을 따라서 가다가 갈래길. 오른쪽으로 가니 없었다. 왼쪽으로 가야 한다.

주차장은 용당동이었는데,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부산 남구 용호동 산 247-2이다.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김재화(金在華)·박진환(朴進煥)·강달영(姜達永)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기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이를 탄압하던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해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다시 9월 6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최웅림(崔雄林)과 같이 대한적십자사 진주지사에 근무하면서 독립군 지원자금을 모금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1921년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출처 : 보훈처 공훈록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자 영복, 자부 조경자, 손 지원 원택
자 영철, 자부 고경자, 손 용훈
신선대 주차장에서 신선대 유원지 산으로 올라가는 길
신선대 정자. 신선대 정자를 지나서 조금 더 가라고 했다.
신선대(神仙臺)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29호
소재지: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 산170번지 일원

신선대는 우암반도의 남단에 자리잡고 있다. 화강암질로 된 해안이 파도의 침식을 받아 발달된 해식애(海蝕崖)와 해식동(海蝕洞)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용당동 해변의 좌안(左岸)에 위치한 바닷가 절벽과 산정을 총칭하여 말한다. 이곳 주변의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이 형상과 같다고 하여 용당(龍塘)이라 불렀다고 하며,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신선이 되어 유람하였다고 전한다. 신선대라는 이름은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란 큰 바위에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 이 탄백마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는 울창한 송림으로 덮혀 있으며 상록활엽수와 낙엽활엽수가 섞여 있다. 아울러 많은 새들이 날아들고 있다. 주변의 경관이 다소 변하였지만,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오륙도와 조도, 맑은 날씨에 수평선 멀리 나타나는 대마도의 전경을 관망할 수 있는 부산의 명승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신선대 정자 앞에서 애국지사 묘소 안내판이 멀리 보였다.
愛國志士 鄭夢錫 墓所(애국지사 정몽석 묘소)

정몽석 선생은 경남 하동출신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투쟁에 일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919년 3월 진주장날 독립만세를 주도하는 한편 독립군 지원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 공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우리고장 부산에 고이 잠드신 애국지사의 숭고한 위훈과 독립정신을 기리고, 묘소와 그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이 안내판을 세웁니다.
1996.1. . 부산광역시 남구청장

← 묘소 입구 150m
애국지사 정몽석 묘소 50m →
묘소 안내판을 따라서 가다가 갈래길. 오른쪽으로 가니 없었다. 왼쪽으로 가야 한다.
주차장은 용당동이었는데,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부산 남구 용호동 산 247-2이다.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993년 3월 1일
愛國志士 晉州 鄭公 夢錫 之墓(애국지사 진주 정공 몽석 지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993년 3월 1일
愛國志士 晉州 鄭公 夢錫 之墓(애국지사 진주 정공 몽석 지묘)
애국지사 정몽석께서는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1896년 4월 16일 출생하셨고 임진왜란시 전공을 세우신 정기룡 장군의 후손이시며 진주 봉래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셨다. 1919년 3월 18일 진주의거에서 학생 청년 군중들을 지휘하시며 선두에서 열렬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시며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시다가 체포되어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1919년 4월 22일) 다시 대구복심법원에서 법적 항일투쟁을 전개하셨으나 1년 징역형을 받으셨다. (1919년 6월 17일) 또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시고 법적투쟁을 계속하셨으나 1919년 9월 6일 상고가 기각되어 1년형이 확정되어 옥중 고생하셨다. 출옥 후에도 대한적십자사 진주지사 사원으로서 독립군자금을 모금 중 일경에 탐지되어 다시 2년 옥고를 겪으셨다. 그후 1923년 진주읍내 형평사 발기회 회원으로 활동하시다가 1961년 8월 16일 여생을 마치셨다.
애국지사 정몽석께서는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1896년 4월 16일 출생하셨고 임진왜란시 전공을 세우신 정기룡 장군의 후손이시며 진주 봉래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셨다. 1919년 3월 18일 진주의거에서 학생 청년 군중들을 지휘하시며 선두에서 열렬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시며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시다가 체포되어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1919년 4월 22일) 다시 대구복심법원에서 법적 항일투쟁을 전개하셨으나 1년 징역형을 받으셨다. (1919년 6월 17일) 또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시고 법적투쟁을 계속하셨으나 1919년 9월 6일 상고가 기각되어 1년형이 확정되어 옥중 고생하셨다. 출옥 후에도 대한적십자사 진주지사 사원으로서 독립군자금을 모금 중 일경에 탐지되어 다시 2년 옥고를 겪으셨다. 그후 1923년 진주읍내 형평사 발기회 회원으로 활동하시다가 1961년 8월 16일 여생을 마치셨다.
부산 경남 3.1운동사(1979년 9월 10일)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 22권(1986년 12월 25일) 진양군사(1991년 4월 20일) 매일신보(1919년 3월 25일) 복심법원판결문(1919년 6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