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애국지사추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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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방곡리 442
탐방로그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방곡리 442 정관박물관.
부지 내에 있는 소두방공원 내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을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머릿돌
⦁탑명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위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정관중앙로 138-11 (정관 박물관 부지 내)
⦁규모 추모탑 1식(분향대 포함 10㎡), 전체면적 330㎡
⦁시공사 (주)에스아이디 연구소 대표: 김규엽
⦁건립일 2012년 12월 20일
⦁주관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건립추진위원회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방곡리 442 정관박물관.
부지 내에 있는 소두방공원 내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을 찾아왔다.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대한제국 말년인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잔학무도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러나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하여 독립선언서로써 우리의 정당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하였다. 이어서 평화적인 독립운동이 2천만 겨레의 가슴과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봄바람처럼 일어나 들불처럼 번졌다.
기장읍내에서 두메인 이곳 정관 사람도 마소가 아닐진대 국권피탈에 가만있으랴. 어찌 선대의 의기와 저 매남산, 솟음산 정기를 져버리랴. 일신과 가문의 안녕만을 바라랴. 여기 뜻있는 몇 분이 앞장서고 따르는 이들 있었으니 1919년 4월 9일 좌천장 3.1독립운동이다.
정관의 지사 다섯 분이 매학리 김종복(金鍾復)의 후원 아래 사랑방 모의를 거듭하였다. 이들은 거사에 목욕재계하고 수십면민과 함께 용수리 조룡산에 올라가 하늘에 빌고 신명을 바치기로 다짐하였다. 거사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근 장안면 좌천장으로 정하였다.
좌천장날인 이날 아침에 장꾼 속에서 동정을 살폈다. 정오가 지날 즈음 정관 출신 다섯 분이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차츰 6백여 명이 하나로 성난 파도가 되었다. 놀란 왜경과 수비대는 총검으로 진압했으나 만세소리는 더욱 우렁찼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50여 명이 좌천주재소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지사 일행이 좌천에서 정관으로 돌아오면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온 산천도 목이 쉬었다. 그 뒤 일본 경찰은 지사들을 차례로 체포하거나 추적하여 세 분은 옥고를 치르시고, 그 중 두분은 고문의 여독으로 출감 후 요절하시고 한 분은 평생 병고에 시달리셨으며 다른 두 분은 숨어 지내느라 가정이 풍비박산되었다.
우리 정관은 예부터 부지런하고 인심 좋기로 소문이 났을 뿐만 아니라 충효의 고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나라사랑으로는 세 분의 임란공신과 한 분 임란 순절자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기상과 기개가 이어 내려와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 기간의 나라가 어지럽고 전란을 겪는 동안에도 지역과 나라를 지키는데 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우리 지역이 아담한 신도시로 개발된 것도 선인의 음덕이니 더불어 살기 좋은 땅으로 가꾸어야 한다. 이에 애국지사와 수 많은 민초들의 나라사랑을 기리고 그 숭고한 애국·애향정신을 신도시 정관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2012년 12월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건립추진위원회
Monument for Patriots in Jeonggwan
On august 29. 1910, the end of the Daehan Empire, we were finally robbed of our country by atrocious Japan. However, the independence movement against Japan's amalgamation started at home and abroad.
On March 1. 1919, 33 delegates, who gathered at Tapgol Park in Seoul, declar ed our rightness to the world that Korea is an independent country. Following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peaceful independence movement was spread out like a prairie fire all over the country. Even though people who lived in Je onggwan, a small town far away from Gijang, was said to be simple hearted, they couldn't remain mere-spectators. How could they be contrary to the hero ic spirits of their ancestors and the spirits of Mt. Maenam and Mt. Soteum! how could they seek only their own well-being! Here are those who led the indepe ndence movement held at Jwacheon Fair on April 9. 1919.
Five patriots of Jeonggwan had secret meetings continuously under the suppor t of Jongbok Kim, who had worked for the public good of the town. Before ta king the action, they performed their ablutions and climbed Mt. Joryong locate d in Yongsuri with tens of people in town. They decided to devote their lives for the independence of our country praying to heaven. The acting place was decided to be Jwacheon Fair in Jangan, where many people used to gather. In the morning of Jwacheon Fair, five patriots from Jeonggwan were waiting f or a chance among the people gathered there. Around at noon they took out Korean national flags and shouted "Hurrah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Gradually the crowd came to be almost 600. It looked like a large wave of w rath. Even though Japanese police tried to put down the demonstration with ri fles and swords, they couldn't succeed to stop shouting. However, in the mid dle of the demonstration, 50 people were taken to the police station. On the way back to Jeonggwan from Jwacheon, they were still shouting out t he independence of Korea. It seemed that all the mountains and rivers also jo ined them and came to have hoarse throats. Afterwards Japanese police track ed down and arrested all the patriots concerned. Three of them had long pris on lives, two of them died early because of harsh torture after they were rel eased from prison. One of them suffered from a severe illness all through the rest of his life. Two of them had to hide themselves all through their life. Jeonggwan has been a well-known town not only for its diligence and generos ity but also its loyalty. Our town produced three patriots and one martyr durin g Korean-Japanese War from 1592 to 1598. Under the influence of this ethos, all the people here were willingly to devote their lives in order to defend our nation and town through national liberation in 1945 and Korean Civil War in 1950. We strongly believe that it is purely due to our ancestors' virtue for our plac e to be developed into a prosperous new town. It is our sacred duty to make our town the best place to live in. Here we construct this monument to praise their patriotism and hope that their sacred devotion to our country and our ho metown should be our everlasting guide for the future.
December, 2012
Committee of Monument Construction for Patriots in Jeonggwan
정관의 다섯 애국지사 – 1919년 4월 9일 3·1독립운동 주동
성명 / 당시 연령 / 형량 / 출신 마을 / 서거일 / 비고
김윤희(金允熙) / 31세 / 징역 10월 / 매학리 매곡 / 1921.5.22. / 1990.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박일봉(朴一鳳) / 21세 / 국내 피신 / 매학리 상곡 / 1938.7.24. /
신두성(辛斗星) / 29세 / 징역 10월 / 용수리 가동 / 1959.9.24. / 1993. 대통령표창 추서
오진환(吳進煥) / 29세 / 상해 망명 / 용수리 덕전 / 1954.10.1. /
정지모(鄭智謨) / 27세 / 징역 10월 / 매학리 매곡 / 1925.10.22. / 1996.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성명은 가나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