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룡 독립운동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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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두명리 산46
탐방로그
부산추모공원과 붙어있는 부산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산 47 백운공원묘지를 찾았다.
이곳에는 애국지사 박희봉, 김기범, 김귀룡 그리고 이종률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이종률 선생은 2021년 4월 10일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이 되셨다.

묘소 위치를 몰라서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할 예정이었는데, 관리사무소에 사람이 없다.

그냥 갈 수는 없고 혹시 독립유공자 묘소 안내판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가다가 만난 안내판

안내판에서 35m의 거리라고 해서

안내판에 큰 탑이 그려져 있었다.

큰 탑은 수목이 우거져 있어서 갈 수 없고, 그 앞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김귀룡은, 1919년 3월 13일의 동래읍(東萊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동래고보(東萊高普)의 학생대표로서 3월 7일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학생 대표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고영건(高永建)·엄진영(嚴進永) 등 대표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3월 10일 동래고보 선배로서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수학교사 이 환(李環)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보 학생의 거의 배후 참모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그는 주동 학생들과 함께 하숙방을 전전하면서 협의한 끝에, 동래읍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태극기·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5백여매의 독립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그리고 수백매의 태극기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 그는 고영건 등과 함께 동래군청 앞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인쇄물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점차 장꾼들까지 가담하여 읍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 광경을 보고 감격한 어떤 조선인 경찰은 제복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떤 조선인 헌병 보조원도 정복을 벗어 던지고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러나 50여명의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야만적인 발포를 감행하면서 닥치는 대로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7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그냥 갈 수는 없고 혹시 독립유공자 묘소 안내판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가다가 만난 안내판
애국지사 김귀룡의 묘
안내판에서 35m의 거리라고 해서
안내판에 큰 탑이 그려져 있었다.
큰 탑은 수목이 우거져 있어서 갈 수 없고, 그 앞에서 찾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 공적비
김귀룡(호 백운)은 1898.6.25일 동래에서 출생 부산진보통학교 동래동명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동명학교 재학 중인 1919.3.13일 3.1 독립운동을 동래에서 주도하였고 당시 2개대를 조직 암암리에 만들어진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선포 독립만세를 불렀고 당시 일본 경찰관 2명에게 중상을 입혀 대구 형무소에서 무기징역을 치르는 중 감형 2년으로 출옥 후 부산시 동구 초량동과 수정동에서 부인 서계순 장남 김영준(현 김영준 정형외과 의원장)과 우거 중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1975.11.16일 생을 끝나시다. 여기 나라에서 비문을 세워 공적을 빛내는 바이다.
증 대한민국 정부
애국지사 묘소 안내판과 뒤편에 보이는 높은 탑과의 사이에 애국지사의 묘소가 있었다.
박희봉, 김기범 선생의 묘소 안내판을 주변을 돌며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박희봉은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그는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 재학 중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끝난 후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동경(東京)에서 2·8독립선언 이후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진행될 때, 그는 조선약학교에 재학하면서 학우들과 함께 3·1운동의 계획에 참여하여, 만세운동 당일에 사용할 태극기 등을 제작하는 한편 동지규합에 힘을 쏟았다. 그는 학우들과 함께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뒤, 시가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때 박희봉은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보신각과 남대문 등지를 비롯하여 시내 각처를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그는 계속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세우고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3·1운동 직후 일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방침을 수정하여 소위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면서 외형적이나마 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따라서 민족운동세력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전국적 조직을 만들어갔는데, 각 지방의 청년회들을 연합한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그것이었다. 박희봉은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결성 초기에 참가하여 1920년 7월 7일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의 지방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김기범(金淇範)은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하동군 청암면(靑岩面) 평촌리(坪村里) 정신교(鄭信敎) 집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정재옥(鄭在玉) 등과 함께 이민(里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그날밤 태극기를 만들어 동리(同里) 광장에 세워 놓고 시위군중을 규합한 후 8일 오후 8시경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토록 촉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그를 구타하는 등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김기범(金淇範) 선생의 묘소는 1년이 지난 후 김종태 선생이 순직소방관 묘지 찾으러 갔다가 발견하여 사진을 보내주셔서 뒷부분에 추가하였습니다.
부산추모공원과 붙어있는 부산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산 47 백운공원묘지를 찾았다.
이곳에는 애국지사 박희봉, 김기범, 김귀룡 그리고 이종률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이종률 선생은 2021년 4월 10일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이 되셨다.
白雲公園(백운공원)
묘소 위치를 몰라서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할 예정이었는데, 관리사무소에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