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 13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나셨다. 이제 공은 가셨으나 공이 일광인에게 새기고간 민족정기 공이 차성군민에게 보여준 조국수호정신 공의 갸륵한 민족애 조국애는 저 달음산과 더불어 길이길이 이 향토에서 푸르리라.
서기 1985년 8월 15일
고려대학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학박사 김정배 근찬
금정여자고등학교 교장 창남 고동주 근서
서기 1985년 8월 15일
고려대학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학박사 김정배 근찬
금정여자고등학교 교장 창남 고동주 근서
헌성
고 박영준 선생 기념사업회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김진옥, 사무총장 신성우, 위원 박태종, 위원 신용수, 위원 이석복, 위원 한태복, 위원 김정근, 위원 최현돌, 위원 김동건, 위원 정용환
후원
양산군수 이두연, 고문 최현제, 고문 장일호, 고문 박덕룡, 고문 김상철, 고문 신준철, 고문 이임두 면장
서기 1985년 을축 11월 일
고 박영준 선생 기념사업회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김진옥, 사무총장 신성우, 위원 박태종, 위원 신용수, 위원 이석복, 위원 한태복, 위원 김정근, 위원 최현돌, 위원 김동건, 위원 정용환
후원
양산군수 이두연, 고문 최현제, 고문 장일호, 고문 박덕룡, 고문 김상철, 고문 신준철, 고문 이임두 면장
서기 1985년 을축 11월 일
부산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 134 독립투사 고 박영준 의사 기념비를 찾아왔다.
박영준 의사 기념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40-1-13 / 관리자 : 기장군 칠암리장
부산동래 사람으로 기장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박영준 의사(1885~1943)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1919년 4월 5일 경남 동래 기장면 장날에 모인 군중과 동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11일 하오 7시경에는 다시 일광면 이천리에서 주민 5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은 후 동년 6월 28일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관리번호 : 40-1-13 / 관리자 : 기장군 칠암리장
부산동래 사람으로 기장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박영준 의사(1885~1943)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1919년 4월 5일 경남 동래 기장면 장날에 모인 군중과 동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11일 하오 7시경에는 다시 일광면 이천리에서 주민 5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은 후 동년 6월 28일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獨立鬪士 故 朴英俊 義士 紀念碑(독립투사 고 박영준 의사 기념비)
獨立鬪士 故 朴英俊 義士 紀念碑(독립투사 고 박영준 의사 기념비)
공은 본관이 밀양이시니 신라시조 혁거세왕의 먼 후손이요 신라 밀성대군의 후예이시다. 아버님의 함자는 봉자 학자 이시고 후사로는 아들 만해와 손자 한규를 두셨다. 공은 서기 1885년 조선조 고종 22년 4월 25일에 동해군 기장면 연화리에서 나셨는바 천성이 강직하여 일찌기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공은 가정의 생계가 고르지 못하여 소시에 주거를 이웃 일광면으로 옮기시니 이천리와는 칠암리 이곳이 바로 공이 사시던 옛터이다. 청년기는 생활이 궁핍하여 망포를 쳐서 삶을 이어나가셨으니 가슴엔 언제나 큰 뜻을 품고 계시며 때가 오기만 기다리
고 계셨다. 기미 1919년 이해는 하늘이 공에게 처음으로 시련을 내리시던 해였다. 이해 3월 1일을 기하여 근역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대한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없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맨주먹으로 일제의 총칼 앞에 분연히 일어서니 이것이 3.1만세항쟁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항쟁은 끝가는 곳을 몰랐고 마침내 만세의 파도는 13일에는 동래성으로 파급되었고 다음달 5일에는 기장읍으로 거세게 물결쳐왔다. 박영준 의사는 내 고장은 내 손으로 의거를 올려야 하겠다는 애국심을 불태우며 이천을 중심으로 서둘러 먼저 뜻있는 청년들과 함께 스스로 앞장을 서 11일 하룻밤 스물 네시간을 만세를 외쳐 시위하여 왜경을 놀라게 하고 일광인의 민족혼과 조국애를 만인 앞에 드러내어 이웃 농어촌에까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3.1항쟁은 장동 일대로 뻗어갔으니 그 기개 어찌 장하지 않으며 그 정기 어찌 가상하지 않으리! 공은 미구에 이곳 만세 거의 주동으로 검거되어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되니 왜경으로부터 몸서리나는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모진 고문 끝에 살은 터지고 뼈는 부서졌으나 공은 만세항거를 혼자 일로 돌렸으니 그 동지애 어찌 범상한 사람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아! 공은 정말 대의 속에서 살다간 의인임이 분명하다. 그 해 6월 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공은 1년의 형을 받자 대의를 천하에 알리기 위해 대구복심원에 공소하였었다. 공은 그 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목다리에 의지하여 귀향하였는바 나머지 평생을 모진 후유증으로 신음 속에서 살다가 1943년 58세를 일기로 외로이 세상을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