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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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786-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연화터널이 시작되는 입구에 멀리 무슨 안내판처럼 생긴 것이 보였다.
이 연화봉에서 묘소가 있을만한 곳은 모두 찾아볼 예정이다.
애국지사 박영출의 묘 입구
그런데 방향표시가 없다.
뒤에 있는 안내판이 훼손되어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 다만 애국장이 추서되었다는 문구만 보인다.
안내판에서 산으로 바로 올라가서 좌측편에 묘소가 많이 보이는 곳을 찾아보았다.
이곳이 산 70번지이고, 산 69-9라는 정보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위쪽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안내판이 있는 산등성이, 좌측 산등성이, 심지어 연화터널 위까지 모두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다시 묘소 안내판 쪽으로 내려오다가... 찾기 시작한 지 1시간만이었다.
이곳은 연화터널로 들어가는 옹벽 바로 옆이었다.
위성지도에서 묘소로 보이는 큰 지역만을 예상지로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기장읍 청강리 786-3이다.
애국지사 박영출 지묘
자는 계출이요 호는 정인이다.본관이 밀양으로 서기 1907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에서 박인표의 장남으로 태어나니 천품이 강직하고 총명하였다. 지사는 기장보통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야마구찌(山口)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셨다. 3.1운동 이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날로 격심하여 탄압과 투옥을 일삼던 서기 1924년 지사가 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반 재학중일때 일본인 교사의 민족적 모욕발언이 발단이 되어 동교사의 배척운동과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동래 장산에서 전교생이 촛불을 들고 일본교육정책에 항거한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퇴학을 당하였다. 또한 서기 1927년일본 야마구찌고등학교 재학중 방학을 기해 동래 수안동 광장에서 있었던 일본 유학생 귀국강연회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정책의 진상과 야만적인 식민지 교육정책등을 실랄하게 비난하며 청중과 합세하여 일경에 항거한 사건으로 부산지방법원에서 6월의 징역선고를 받았다. 그후 서기 1924년 일본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고국에 돌아와 조선청년광복단을 조직하고 "자연은 인간을 자유와 행복으로 조성하는데 일제의 조선인을 사악과 노예의 자?으로 조성한다"고 호소하고 자유주의 교육을 제창하며 일제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하여 서울일원에서 항거투쟁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기 1936년 7월 3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4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 고문치상으로 긑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채 서기 1936년 8월 20일 옥중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찬양하여 서기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으며 모교인 동래고등학교에서도 서기
1978년 3월 20일 52년만에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아! 하늘은 어찌하여 박지사를 빨리 불러 갔던가? 저기 하늘에 가고도 아니가는 해와같이 있듯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월속에 아니죽는 인걸이 있으리오만.... 폭력을 몰아내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다 한번밖에 누릴수 없는 영원한 길잡이가 되리라 정부에서는 그 공적을 후세에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우다.
서기 1984년 10월 15일
박영출 선생 묘소를 찾기 위해 기장을 방문했다. 위치를 설명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자료는 잘못된 것이고 청강리 연화봉자락 부근인 것을 알게 되어 이곳을 찾았다. 이곳은 연화터널 입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