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34-1
- 탐방로그
- 광주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찾기 위해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34-1에 왔다.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이 왼쪽으로 이동을 하고 그 옆에 광주항일운동기념탑이 건립됐다. 기념탑 좌우에는 구연영 의병장과 이종훈 지사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춘경 구연영 의병장
정암 이종훈 선생
정암 이종훈 선생
기미독립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 본문 내용 중]
기미독립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 본문 내용 중]
정암 이종훈 선생
춘경(春景) 구연영(具然英)(1864~1907)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궁평리 출신, 본관은 능성, 구한말 정부 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하여 1895년 12월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등과 이천에서 창의소를 결성하고 중군장이 되어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서울 진공을 계획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관군의 공격으로 1896년 3월 남한산성이 함락되어 계획이 좌절되었다.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구국회를 조직하고 매국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여 항일투쟁의 필요성과 구국 계몽 활동을 펼쳐나가다가 구국회 지도자들이 체포될 때 함께 순국하였다.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궁평리 출신, 본관은 능성, 구한말 정부 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하여 1895년 12월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등과 이천에서 창의소를 결성하고 중군장이 되어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서울 진공을 계획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관군의 공격으로 1896년 3월 남한산성이 함락되어 계획이 좌절되었다.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구국회를 조직하고 매국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여 항일투쟁의 필요성과 구국 계몽 활동을 펼쳐나가다가 구국회 지도자들이 체포될 때 함께 순국하였다.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암(正菴) 이종훈(李鍾勳)(1856~1930)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유사리 출신, 본관은 광주, 1894년 동학농민운동 중군으로 우금치 전투에 참가하였고 1902년 손병희와 일본으로 망명하여 권동진, 오세창 등과 만나 쇠약해가는 국운과 부패와 혼란에 찬 사회를 통탄하고 구국의 방도를 논의하였다. 1910년대 천도교의 비밀결사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와 천도교 구국단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7월 고려혁명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만주에서 병사하였다.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유사리 출신, 본관은 광주, 1894년 동학농민운동 중군으로 우금치 전투에 참가하였고 1902년 손병희와 일본으로 망명하여 권동진, 오세창 등과 만나 쇠약해가는 국운과 부패와 혼란에 찬 사회를 통탄하고 구국의 방도를 논의하였다. 1910년대 천도교의 비밀결사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와 천도교 구국단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7월 고려혁명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만주에서 병사하였다.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해공 신익희선생 상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34-1 해공선생 동상 옆 광주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찾았다.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 건립 취지문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남한산성 항일운동을 재조명하는 뜻이 담긴 기념탑을 이곳에 건립함은 광주지역 항일운동사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1896년 서울 관군 진공계획을 목표로 일어난 광주, 이천, 양근 등 1600여명의 연합의진으로 정토군과 의병진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인 곳이다. 또한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남문에 집결한 만세시위대가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항일운동사에 중요한 격전지였던 남한산성에 광주 출신으로 구한말 의병 춘경 구연영 의병장,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정암 이종훈 선생, 임시정부를 대표한 해공 신익희 선생 3인을 재조명하게 된 것은 광주 항일운동사의 큰 뜻이 담긴 일이라 할 것이다.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남한산성 항일운동을 재조명하는 뜻이 담긴 기념탑을 이곳에 건립함은 광주지역 항일운동사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1896년 서울 관군 진공계획을 목표로 일어난 광주, 이천, 양근 등 1600여명의 연합의진으로 정토군과 의병진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인 곳이다. 또한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남문에 집결한 만세시위대가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항일운동사에 중요한 격전지였던 남한산성에 광주 출신으로 구한말 의병 춘경 구연영 의병장,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정암 이종훈 선생, 임시정부를 대표한 해공 신익희 선생 3인을 재조명하게 된 것은 광주 항일운동사의 큰 뜻이 담긴 일이라 할 것이다.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
본 작품은 남한산성을 기점으로 진행되었던 광주지역 항일운동의 특성을 반영하여 구성되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일제에 저항하던 의지를 묘사한 작품으로 광주, 이천, 양근 등 세 진영이 주축으로 연합하여 남한산성 성벽을 넘어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모습 자체를 상징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을 의미하는 부조벽 좌측에는 3.1운동 모습을 연출하고, 우측에는 남한산성에서의 의병항쟁 장면을 연출하였다.
본 작품은 남한산성을 기점으로 진행되었던 광주지역 항일운동의 특성을 반영하여 구성되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일제에 저항하던 의지를 묘사한 작품으로 광주, 이천, 양근 등 세 진영이 주축으로 연합하여 남한산성 성벽을 넘어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모습 자체를 상징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을 의미하는 부조벽 좌측에는 3.1운동 모습을 연출하고, 우측에는 남한산성에서의 의병항쟁 장면을 연출하였다.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이 왼쪽으로 이동을 하고 그 옆에 광주항일운동기념탑과,
좌우에 구연영 의병장과 이종훈 지사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좌우에 구연영 의병장과 이종훈 지사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廣州(광주)항일운동기념탑
廣州(광주)항일운동기념탑
춘경 구연영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