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30-7(청룡예전로
- 탐방로그
- 부산 금정구 청룡동 30-7(청룡예전로 11-10)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김법린이 체포될 당시 살았던 곳을 찾아왔다. 하지만 김법린 선생이 사셨던 11-10은 없다. 11-9 다음이 바로 11-11이다. 당시 번지 주소와 현재 번지 주소가 달라지면서 생긴 오류인 것 같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 애국지사의 생가 터임이 확실하다면 이 곳에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두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지만 김법린 선생이 사셨던 11-10은 없다. 11-9 다음이 바로 11-11이다.
김법린(金法隣, 1899~1964)은 3·1운동 당시 동래장터 만세시위에 관여하고 1919년 4월 상해로 도항하였다. 1920년 의용승군을 계획하고 국내로 귀환했으나 좌절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파리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1928년에 귀국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30년에는 만당을 조직하여 일본동경지부 책임자로 활동했고, 1938년 만당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해방후 불교중앙총무원장으로 불교혁신운동에 힘썼으며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5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범산 김법린 선생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쌍문1동에 있다.
해방후 불교중앙총무원장으로 불교혁신운동에 힘썼으며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5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범산 김법린 선생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쌍문1동에 있다.
부산 금정구 청룡동 30-7(청룡예전로 11-10)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김법린이 체포될 당시 살았던 곳을 찾아왔다.